전 충청일보 기자 김금수씨 빨갱이된 사연
육영수여사 비하발언 덧씌워 국보법 2년 옥고

   
▲ 김금수 씨.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악법 중의 악법이다. 사람의 말 한마디를 꼬투리 잡아서 걸면 걸리는 것이 박통 시절의 국가보안법이었다. 난 꼬투리 잡힐 말도 기억도 안나는데, 그냥 14살짜리 가정부를 유일한 증인으로 내세워서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난 76년 충북의 유일한 일간신문이었던 충청일보 현직 기자가 ‘빨갱이’로 몰려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단양 주재기자로 활동했던 김금수씨(62 전 충청일보 전무)는 자신을 ‘관제(官製) 빨갱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잠언이 무색하게, 유신 독재정권은 현직 언론인을 하루아침에 국가보안법의 나락으로 밀쳐냈다. 김씨는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로 2년간 복역한 뒤 야당의 거목이었던 YS를 서울에서 만나 20여년간 정당인으로 활약했다. 지난 2000년 충청일보사 임원으로 원대복귀했지만 자신의 인생을 뒤바뀌게 한 그 사건은 또렷한 ‘주홍글씨’로 가슴속에 남아있다.

최근 정국이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에 휩싸인 가운데 김씨는 어렵사리 충청리뷰 취재진에 자신의 ‘주홍글씨’를 공개했다.
지난 62년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한 김금수씨는 19살 풋풋한 청년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초등학교 교사재직중 군복무까지 마친 김씨는 68년 지인의 권유로 충청일보 입사시험을 치르게 된다.

“아내도 교사였는데, 아는 분이 ‘선생은 한 사람만 하면 된다’며 충청일보 시험을 치르도록 권했다. 당시 사회적인 인식도 교사보다는 기자가 평가받던 시절이고 초등학교 교사가 내 적성에도 맡지 않아 지원서를 냈는데, 합격하게 됐다”

14살 가정부 증언에 국보법 기소
김씨는 지역신문사 기자로 성공적인 ‘제 2의 길’에 안착했고 단양 주재기자로 발령났다. 부인이 교사였기 때문에 집안 일을 도와줄 일손으로 14살난 가정부(식모)를 두게 됐다.

하지만 시골의 순진한 어린 가정부가 김씨의 인생궤도를 탈선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75년 8월 15일, 한민족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광복절이지만 단양 시내 분위기는 무거웠다. 바로 1년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육영수여사가 숨진 1주기였기 때문이다.

단양군청 회의실에 빈소가 마련되고 1년전과 똑같은 추도식이 열렸다. 이날 밤 11께 술자리를 마치고 귀가한 김씨는 TV방송 마감뉴스를 통해 육여사 애도현장 보도를 보고 잠들었다. 그로부터 40일이 지난 9월 25일 밤 11께, 김씨 집으로 단양서 정보과 형사 2명이 들이닥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호통을 쳤지만 막무가내였다. ‘일단 가보시면 안다’면서 경찰서 정보과로 끌고갔고 잠도 못자게 한 채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내가 광복절날 밤에 집에 돌아와 TV보다가 ‘본처 제쳐두고 살다가 죄받아서 죽은 사람(육영수여사)이 뭐가 불쌍하다고 저렇게들 우느냐’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우리 식모 애가 그렇게 얘기했다고 시인하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김씨 연행에 앞서 경찰은 14살 가정부의 사전 진술을 받아내 추궁했던 것이다. 김씨의 부인도 참고인으로 출두해 발언사실이 없다고 덧붙였지만 받아들여 지지않았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고무찬양)로 기소됐고 청주지법 제천지원 단독심 판사가 공소사실을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후 청주지법 항소심에서 징역 2년으로 형이 확정돼 대전교도소에서 ‘팔자에 없는’ 사상범으로 옥고를 치르게 됐다.

육여사 비하발언이 북에 동조?
김씨는 경찰, 검찰조사를 비롯해 법원 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발언사실을 부인했지만 국가보안법 사건에 예외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재판과정에서 변호인(청주 정기호변호사)은 경찰이 내세운 가정부를 증인으로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판사실에서 녹음 진술받은 테이프를 증거물로 인정하고 말았다. 당시 유신 긴급조치 정국에서는 신문기사의 사전검열이나 중앙정보부의 사법부 공안사건 개입이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김씨 또한 자신의 사건배후에 정보기관이 개입됐다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내가 하도 답답해서 재판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내가 공소사실과 같은 진술을 했다고 칩시다, 육여사가 본부인이 아니라서 벌을 받았다고 얘기했다면 그게 명예훼손죄가 되지, 어떻게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느냐’고 따졌다. 검찰에서 내세운 논리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문세광이 육여사를 암살했는데 그게 잘됐다고 칭찬한다면 결국 김일성에 동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이런 억지 논리가 어디있는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이런 경우 아닌가?”

김씨는 대전교도소 수감생활 중에 자신과 똑같은 함정에 빠진 국가보안법 수형자들을 만나게 됐다. “경기도 안성의 중학교에 재직했던 김선생은 수업시간중에 신문에 실린 남북간 군전력 비교기사를 애들한테 얘기했다가 걸려들었다. 그때 정부에서는 국민들 안보의식 강화차원에서 북한 군사력이 우세한 것으로 자료를 내보냈는데 그걸 얘기한 것이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가 된 것이다. 또 한 사람은 대전에서 버스기사를 했던 사람인데, 동료들하고 저녁에 술한잔 하다가 6 25시절 얘기를 한 것이 덜미를 잡혔다. 이 사람이 어릴 때 전쟁을 겪었는데 그때 인민군 여성이 어린애들을 모아놓고 가르쳐 줬다는 북한 노래를 한 소절 부른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경찰, 정보기관 보복차원 수사의혹
김씨는 자신에 씌워진 보안법의 올가미가 경찰과 정보기관의 보복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육여사가 사망당시 전국 각지 시군마다 분향소를 마련하고 추도식을 열고 대단했다. 몇 년뒤에 박대통령이 죽었을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시군 주재기자들은 지역에서 몇 명이 분향하고 추모 분위기가 어떤지 기사를 써올렸다. 난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관련 기사를 송고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게 정보기관에서 요주의 인물로 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숨진 육여사의 고향이 옥천이었기 때문에 당시 충청일보는 전 지면에 걸쳐 애도기사로 ‘도배’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대해 당시 충청일보 편집국장 김영회씨(본사 고문)는 “당시 유신 치하에서 국보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엄혹한 시대상황에 갇혀 회사차원의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말했다.

2년간 옥고를 치른 김씨는 출소후 지난 79년 가족들과 함께 생활 근거지를 서울로 옮겼다. 상경한 김씨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자신의 억울하고 딱한 사정을 털어놓았고 ‘상도동계’ 식구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했고 88년 통일민주당 대외협력국장으로 활동했다. 지난 2000년 충청일보 전무로 ‘금의환향’해 국가보안법으로 빼앗겼던 언론인의 꿈을 스스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현재는 청주 사직1동에 개인사무실을 내고 선삼청주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물론 요즘은 나같은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기소를 하진 못하겠지만 국가보안법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포괄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를 헌법에 보장한 국가가 국민의 양심과 사고를 이토록 억누르는 경우가 있는가? 남북간 화해와 평화를 내세우면서 국보법에는 북한을 대한민국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시대변화에 따라 법은 소멸하거나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김씨는 자신과 같은 ‘주홍글씨’의 피해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길 바란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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