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상당산성 동문이 열리던 날
 

하늘에서 내려다 본 상당산성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1728년(영조 4) 3월 말.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안성에서 반군이 크게 패하였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날 밤. 김진희金晋熙는 7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성문을 두드렸다. 문루 밖으로 내려다보는 반군을 타일러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신천영申天永을 사로잡았다. 무신년戊申年 청주의 반군은 그렇게 무너졌다.

같은 달 15일 읍성에 돌진하여 병사와 영장을 척결한 반군의 거사는 안성과 청주에서 패하며 실패하고 말았다. 연이은 난리 소식과 가담자의 이탈, 영조의 노련한 대처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이들의 도전은 좌절하고 말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신란,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다. 읍성의 병영을 장악한 반군이 곧바로 돌진한 곳은 상당산성이었다. 산성에는 병사의 지휘를 받는 우후 휘하의 정예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나자 우후 박종원朴宗元은 반군에게 항복하며 제대로 된 저항조차 없었다. 역사에서 상당산성이 빈번히 등장한 사건이었다.

사실 상당산성은 임진왜란을 겪은 조정이 한양을 지키기 위한 보루로 거듭 고쳐 쌓았던 곳이다. 왜란이 일어난 지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빼앗기면서 청주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진 결과였다. 우리가 지금 자랑으로 여기는 상당산성의 온전함은 왜란의 결과였다. 하지만 왜를 막기 위해 쌓은 산성이 오히려 내란의 전장이 된 기막힌 사연의 현장이다.
 

남문 동쪽 치 오른쪽 성돌에 남은 ‘장양덕부’ 새김글.
동북 암문의 새김글. 양덕부의 이름은 최근 누군가가 지웠다.
성벽에 새긴 사패四牌. 구간을 표시하거나 공사에 참여한 무리를 표시한 것이다.

성벽에 새긴 글자의 기막힌 사연

무신란은 영조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일부 소론과 남인의 반란이었다. 청주의 이인좌, 전라도의 박필현朴弼顯, 경상도의 정희량鄭希亮 등이 난을 주도했다.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촉발하였다. 그날 밤 청주성이 터무니 없이 함락한 이유를 『영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은 이봉상李鳳祥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를 지르며 영부營府로 돌입하니, 영기營妓 월례月禮와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기생 월례와 함께 또 한명의 기생이 있었다. 비장 홍림洪霖의 아이를 잉태한 해월海月은 난이 진압된 후 열녀로 추앙되었다. 그리고 월례와 함께 성문을 연양덕부. 반란에 가담한 만큼 난 실패 후 그들의 행적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양덕부의 이름은 상당산성에 올곧이 남아있다.

남문 동쪽에 치雉가 있다. 이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10여 m 지점 성벽에 ‘장양덕부將梁德溥’란 새김글이 있다. 반란에 가담하였던 양덕부가 이곳 일부를 쌓을 때 책임자였던 셈이다. 1728년 이전 언제 쯤이다. 보다 구체적인 그의 자취는 진동문에서 성벽을 따라 오르면 동북 암문暗門이 있다. 이곳 안쪽에 그의 이름이 새겨있다. 암문 안쪽에 ‘변수동지서세량邊首同知徐世良’이란 글귀와 함께 ‘패장한량牌將閑良 양덕부’라는 새김글이 있다. 이곳 암문 돌기둥에는 강희경자康熙庚子를 새겨 1720년(숙종 46)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양덕부는 1720년 동북 암문을, 무신란이 일어나기 직전 남문 가까이의 성벽도 고쳐 쌓았던 책임자였다.

상당산성을 쌓았던 그가 반란군에 가담하여 읍성의 성문을 연 것이다. 상당산성에는 성문과 성벽 곳곳에 이처럼 산성을 고쳐 쌓은 이들의 이름이 새겨있다. 요즘의 공사 책임자를 명시한 셈이다. 성벽 바깥을 돌아 성벽 곳곳에 남아있는 글자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남문 앞에서 찾은 사량부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다. ‘사량부속장지일沙梁部屬長池馹’인데, 사량부에 속한 장지역으로 해석된다.

다시 남문에 서서

남문 앞 주차장은 산성을 찾은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가끔은 무리에 섞여 남문으로 향한다. 남문 앞에는 산성을 설명하는 문화재 안내판이 있다. 상당산성이 백제 때 청주의 옛 이름인 상당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당산성은 백제 때 쌓은 것일까.

지금과 같이 돌로 쌓은 산성 이전에 성터의 자취를 찾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1995년 남문 앞 지금의 잔디 광장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물론 당시 백제 때의 성터는 찾지 못하고 의외의 성과를 얻었다. 이곳 광장에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둥근 화덕을 만들고, 주판알 모양의 가락바퀴로 실을 뽑던, 그리고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어 살던 사람들이다. 바닷가나 강가에 산 줄만 알았던 신석기인들이 산성 앞에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백제인들이 살았던 집터도 함께 찾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이 산성을 쌓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 오히려 이후 성벽에 대한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직후 산성을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에 서원소경을 설치하던 그때였다. 『삼국사기』에 김유신의 아들 원정元貞을 따라온 구근仇近이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단지 하나의 기록에 불과하여 여태껏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산성 곳곳에서 통일신라 때의 유물이 나와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특히 남문 앞에서는 사량부沙梁部라 새긴 기와 조각이 여럿 나왔다. 물론 신라는 6세기 중엽이후 부部를 쓰지 않았지만 여전히 이곳 청주에서는 그 명칭을 고집했다. 사량부는 곧 진골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산성 안 운주헌運籌軒 터에서도 통일신라 때의 건물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직후 이곳에 성을 쌓았던 것만큼은 확실한 듯하다. 삼국 전쟁의 여운이 채 가시기 이전 신라 사람들은 평지보다는 산성에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발굴조사로 드러난 운주헌 터(2010년).

상당산성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상당성古上黨城과 따로 상령산성上嶺山城이 있다. 다른 곳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두 산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당산성이다. 아마도 이 책을 정리한 이가 착각을 한 듯하다. 그렇지만 이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 이전에 이미 돌로 쌓은 성이 있었고 그곳에 우물이 여럿 있었던 사실을 알수 있다. 이 책에 이미 청주는 백제 때의 상당현이라 하였으니, 고상당성은 그것을 염두에 둔 것 같다. 하지만 엄연히 상령산에 산성이 있으니 후자를 빠뜨릴 수 없었던 듯하다.
 

2004년 발굴조사로 밝혀진 옛 서문터다. 지금의 서문바깥에 문터가 있고 성벽이 이어진다.
북쪽 성벽 바깥으로 옛 성벽이 남아있다. 조선 후기 숙종때 다시 쌓기 전 성벽이다.

원균이 쌓은 성벽은 어디일까

적어도 지금의 성벽 이전에 옛 성터가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것이 구근이 쌓은 것인지, 외적의 침입이 빈번하던 고려시대에 쌓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서문인 미호문弭虎門 앞의 옛 서문터는 조선시대 이전에 만든 것이다. 지금의 미호문은 성벽을 다시 쌓으면서 안쪽으로 들여쌓은 것이다. 미호문에서 동북 암문에 이르는 길에 옛 성벽이 남아있다.

또한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 밀려 충청병사에 부임한 원균이 상당산성을 고쳐 쌓았다. 이것은 원균의 포학함을 드러내기 위한 기록이지만 산성 일부를 고쳐 쌓은 것은 확실하다.

많은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포곡식 산성

상당산성은 포곡식 산성으로 나눈다. 계곡을 끼고 있다는 뜻이다. 삼국시대의 산성은 주로 산꼭대기에 있다. 멀리 볼 수 있고 적이 오르기 힘든 장점이 있다. 반면 많은 병력이 주둔할 수 없고 무엇보다 물과 식량을 많이 둘 수 없는 약점이 있다. 따라서 후대로 오면서 점차 물을 얻을 수 있는 계곡을 끼고 많은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곳을 택하였다. 포곡식 산성은 몇 고을 백성들이 피난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삼국시대의 성벽이 높고 가파른 것에 비해 조선시대의 성벽은 낮고 두텁다. 그것은 전쟁에 대포를 사용하면서 그 충격을 견디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결과였다. 바깥쪽은 커다란 성돌로 가지런히 쌓고 안쪽으로 점차 작은 크기의 돌을 채우고 흙으로 덮은 모양이다. 대포알이 날아와 성벽을 때려도 버틸 수 있는 구조다. 남문 동쪽 치의 아래 부분은 고구려의 돌쌓기 기술을 채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성돌 위쪽에 단을 만들어 위쪽 성돌이 바깥으로 튀어나가지 않게 하였다.
 

남문 근처의 성벽으로 기초를 튼튼히 한 후 안으로 들여 쌓았다.
남문 동쪽 치 아래 부분의 성돌은 바깥쪽에 턱을 두어 성돌이 바깥으로 밀리지 않게 하였다.

지금의 모습과 같은 성벽은 조선 후기 숙종 때 고쳐 쌓은 것이다. 1716년(숙종 42)부터 4년간에 걸쳐 성벽을 고쳐 쌓았고, 19세기에 들어서도 성벽 보수가 계속 되었다. 그 결과 둘레 4.2km의 산줄기를 따라 빠짐없이 성벽을 이뤘다. 그리고 세 곳의 성문과 두 곳의 암문, 서장대와 동장대, 그리고 십여 곳의 포루를 완성하였다. 이곳은 3,500명의 병사와 승려들이 배속되어 산성을 지키고 유지하였다.

공남문 안쪽 커다란 성돌에 새겨진 글귀와 그 앞쪽에 세운 구룡사九龍寺 사적비는 산성의 보수기록이다. 1802년(순조 2) 여장의 완성, 1807년 충주 사람들이 동원되어 남문을 새로 만든 기록, 1809년 어딘가의 보수기록, 1836년 남문과 좌우 성벽의 보수 등 공사실명제의 자취이다.

구룡사 사적비는 1764년(영조 40) 은재거사恩齋居士가 썼다. 산성 안쪽 세 곳의 사찰과 1716년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던 사실을 전한다.
 

원래 구룡사 옛 터에 있던 구룡사 사적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9호)는 1970년대에 남문 앞으로 옮겨 놓았다. 높이 133cm.

구룡사의 옛 터를 찾아

구룡사 사적비의 기록을 따라 구룡사 터로 향한다. 구룡사 가까이에 남악사南岳寺·南嶽寺가 있었고 서장대 아래에 장대사將臺寺가 있었다. 구룡사는 1720년(숙종46) 창건하였고, <상당산성도上黨山城圖>에는 5동의 건물과 장고醬庫 등 66칸의 건물이 그려져있다.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우물과 사적비를 세웠던 비좌가 남아있다.
 

구룡사 터 입구 사적비를 세웠던 자리로 우물 옆 암반 위에 비좌를 파냈다.
상봉재의 마애선정비.

상당산성 가는 길

산성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산성 안팎의 주차장에 가득 찬 차량과 몇몇 음식점에 줄지어 선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 모두에게 산성은 건강과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요즘 산성 도로에서 빈번한 사고가 들린다. 급한 경사와 무게를 이기지 못한 화물차의 드러누운 사진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전 산성도로는 명암약수터를 지나 구불구불 길을 올라 닿았다. 눈이라도 오면 차단되기 일쑤였다. 지금은 걷는 길로 바뀌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상령산의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 뚫은 길이라고 한다. 실제 산성 안쪽 곳곳에 채굴 흔적이 있고, 동쪽 성벽 아래는 굴을 뚫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나 두 곳의 산성도로 이전에는 주로 산길을 따라 산성에 닿았다. 상봉재다. 상봉재 못미처 남아있는 마애선정비는 당시 산성을 오르는 큰 길이 어디인지를 말해준다.

다른 선정비와 달리 바위에 집 모양으로 만들어 독특하다. 물론 이곳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청백리는 아닐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흔적일 뿐이다.
 

거질대산 봉수(문화재자료 제26호)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냈다. 문의 소이산 봉수에서 신호 받아 진천 소을산 봉수로 보냈다.

상봉재로 오르는 것대산 봉수

상봉재에는 이곳에 전해오는 옛 이야기를 옮겨놓은 안내판이 있다. 무신란 당시 봉화를 올렸다는 극적인 이야기다. 사실 여부를 떠나 대중이 기억하는 봉수였다. 실제 봉수대에는 백 명의 봉수군과 보군이 속해 있었고, 25명씩 교대로 근무했다. 다시 25명은 5개 조로 나누었으니 노인 한명이 맡았던 것은 더욱 아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봉수가 필요 없다는 의견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관의 입장에서는 백 명의 효용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봉수제는 유지되었다.

지금 것대산 봉수는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하였다. 옛 모습에 대해 이견도 있지만 다섯 봉돈을 세워 외적의 동향에 따라 각기 다른 신호가 가능했다.
 

원래 공남문 문루의 돌기둥. 문루의 나무 기둥은 지금과 달리 높다란 돌기둥 위에 세웠다.

산성은 조상이 남긴 선물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국난극복사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전국의 많은 산성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예산을 들여 보수하였다. 이에 따라 상당산성도 1970년 사적 제212호로 지정하였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듭 고쳐 쌓고 있다. 나라를 잃은 후 세 곳의 문루는 무너지고 성벽도 곳곳이 허물어졌었다. 따라서 1970년대의 보수는 성벽의 위용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급속한 복원으로 제 모습을 잃은 경우도 있다. 공남문의 기둥돌은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지금과는 다른 문루 본래의 모습을 기다리고 있다.

2015년 미호문을 보수하다 발견한 상량문을 보면 1978년 비로소 미호문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해 틈이 벌어지고 기운 성문을 보수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 옛 모습의 상당산성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특히 상당산성의 옛 지도는 산성 복원의 밑그림이다.
 

구례 운조루에 보관되어 있던 <상당산성도>는 19세기 전반 상당산성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동장대인 보화정輔和亭이다. 복원하면서 기단을 반듯하게 높게 쌓고 전부를 마루로 깐 오류가 있지만 지금도 많은 이들이 쉬는 공간이다. 2015년 서장대인 제승당制勝堂을 복원하여 산성이 또 하나의 명소가 되었다. 제승당은 1995년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제 모습을 갖추었다. 이로써 산성 안 병력의 훈련과 지휘를 맡던 동·서장대가 모두 갖춘 셈이다. 아직도 운주헌을 비롯하여 성 안쪽의 여러 건물은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온전한 성벽과 함께 성 안쪽의 건물을 복원한 다음이다.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큰 고민일 것이다. 완전한 복원을 기대하며 활용에 대해 생각해 본다. 단순한 건물 복원은 그저 토건 사업에 불과할 것이다. 19세기의 상당산성도에 기초한 상당산성 복원은 그 활용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산성 안쪽에 점차 회복되고 있는 자연환경도 고려해 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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