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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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빠지다
  • 충청리뷰
  • 승인 2017.03.24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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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영화 통해 만난 <낯선여인의 편지>와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백창화 괴산숲속작은책방 대표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문학동네 펴냄

오랜만에 긴 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전 여행 가방을 앞에 두고 챙겨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슬프게도 중년 이후의 여행길에 1순위로 챙기게 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처방약 봉지들이다. 허리 아플 때 먹는 약, 귀 아플 때 먹는 약은 오래 지니고 사는 내 병들에 대한 배려고 각종 비타민과 영양제는 안심보험의 성격에 가깝다.

그 외는 몸도 마음도 가볍다. 젊은 시절,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가장 먼저 들고 갈 책들의 목록부터 살피던 것과는 달리 최근의 내 여행 가방 속에 책이란 없다. 예전엔 가이드북도 필요했고 읽어야 할 소설도 필요했고 모국어의 그리움을 달래줄 시집도 하나 챙겨 넣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내 여행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는 스마트폰이다.

구글 지도로 길을 찾아가고, 여행 정보는 각종 웹사이트에서 얻으며, 무엇보다 전자책과 팟캐스트의 세계는 내 여행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노안 덕분에 밤에는 글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온통 얼굴을 찡그리며 어두운 스탠드 불빛 아래 책을 펼쳐볼 이유가 없다. 귀에 이어폰 하나 꽂고 책 읽어주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여행의 피로와 시차에도 불구하고 금세 숙면에 빠져들게 된다.

종이책 예찬자이자 활자 중독인 내게 오디오북의 신세계를 열어준 책이 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의 편지>다. 이전에도 팟 캐스트, 특히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들은 즐겨 듣고 있었지만 책이란 직접 읽는 맛이라고 생각해왔기에 낭독 프로그램은 듣질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채널들을 검색하다 평소 읽고 싶었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이 낭독 목록에 있기에 한 번 들어볼까, 했던 것이 그만 내 맘을 사로잡았다.

제목처럼 이 책은 편지글이다. 유명 소설가 R에게 어느 날, 두툼한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편지는 그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낯선 여인으로부터 온 것이고 책 전체가 이 여인의 편지글로 되어 있다. 어쩌면 이런 구성 때문에, 목소리 고운 여자 아나운서가 감정을 담아 읽어 내려가는 편지글에 그만 몰입해버렸는지 모른다.

팟 캐스트와 ‘낯선 여인의 편지’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
시작은 강렬하다.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 매트 졸러 세이츠 지음 조동섭 옮김 월북 펴냄

“저를 전혀 모르는 나의 사랑이여. 제 모든 삶을 아셔야 합니다. 전 항상 당신 것이었는데 당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셨지요. 제 삶의 전부를 당신에게 다 털어놓고 싶습니다. 당신을 알게 된 바로 그날 처음 시작된 이 삶을 말입니다.”

떨리는 듯한 음성으로 비운의 사랑을 읽어 내려가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나는 완전히 몰입되었고 낭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절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아무런 예고편도 기대감도 없이 곧장 이야기의 정수를 만났을 때 느껴지는 충격과 감동 같은 것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여운은 길어서 낭독이 다 끝나자 나는 곧장 책을 구입했고 종이책으로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만났다.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작가에 곧 빠져 들어갔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엘리트 지식인이었지만 나치 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을 떠나야 했다. 그의 책은 금서가 되고 불태워졌으며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였음에도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수모를 당했다. 결국 그는 사라져가는 유럽의 순수를 절망하며 부인과 함께 약물과다복용으로 동반 자살하고 만다.

그가 자살하기 한 해 전에 쓴 자전적 회고록 <어제의 세계>는 사라져가는 유럽의 고급 문화와 선한 인간성의 상실에 대한 절망으로 가득차 있다. 이 책은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고 2014년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이라는 영화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독특하고 아름다웠던 이 영화를 통해 내게는 조금 어렵고 멀었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한 발 가까워졌고 팟 캐스트를 통해 <낯선 여인의 편지>가 주는 감동을 맛보았으니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연히 발견되는 책과의 만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져간 약봉지를 한 번 열어보지도 않은 채 여행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시차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오늘 밤 내 귓가엔 허수경 시인의 시가 꿈결같이 흘러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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