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청주의 진산鎭山, 와우산

우리에겐 우암산이 익숙한 이름이다. 조선 영조 때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와우산臥牛山이 처음 보인 이래 일제강점기 즈음부터 우암산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 산을 기록에 보이는 대로 와우산으로 부르자고 거듭 주장하고 있으나, 대답은 그저 우암산이다. 와우산은 청주시 상당구 수동과 우암동, 명암동, 용담동, 대성동 등지에 너른 산줄기가 펼쳐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삶의 터전은 청주의 역사였다.
 

남서쪽에서 바라본 와우산.

와우산은 일찍부터 청주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와우산 자락 곳곳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이 발견된다. 산자락 아래 구릉의 청동기시대 집터는 지금껏 남아있는 오랜 자취이다. 그리고 백제 때 토성을 쌓기 직전 이곳 산줄기를 따라 무덤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와우산은 평지의 청주 읍치와 함께 역사의 중심이었다. 조선 말기의 서원팔경西原八景에도 여지없이 와우산이 등장한다. 무심천 언저리를 거닐던 시인의 귀에, “와우산 목동의 피리 소리[牛山牧笛]”가 들렸던 것이다.

우리 지역을 처음 소상히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청주목 산천山川에는 당이산唐羡山이 보인다. 당이산은 고을 동쪽 1리에 있는데, 청주의 진산鎭山이며 토성 터가 있다고 하였다. 흔히 당이산, 혹은 당산은 와우산에서 갈라져 내려와 향교를 감싸는 끝자락에 있는 산으로 알고 있다. 마침 이곳엔 토성이 있으니, 지금의 당산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고을의 진산이란 표현이 주목된다. 진산은 고을마다 중요하고 큰 산을 골라 하나씩 정하였다.

그리고 고을의 상징적인 수호 기능과 실제 방어시설의 역할을 겸하고 있으니 당연히 옛 성터가 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진산을 기록한 예가 크게 줄어들고 오히려 주산主山이란 표기가 늘고 있다. 그것은 인근에 대규모의 석축 산성을 쌓으면서 방어 기능이 옮겨간 때문이다.

한편 같은 책의 고적조에는 이름 없는 산성이 있다. “산성은 고을 동쪽 2리에 있고 흙으로 쌓았다. 둘레는 5,022척尺이고 안에 네 곳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무너졌다.” 고 하였다. 산천과 고적에서 언급한 당이산과 산성은 거리상 다른 곳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와우산과 지금의 당산은 같은 산줄기로 토성에 이르는 거리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물론 예로부터 지금의 당산이 곧 당이 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청주 동쪽에 우뚝 솟은 해발 353m의 높은 산을 무시하고 높이 104m의 산봉우리만 언급했을 리 없다.

와우산이란 이름은 조선 후기 영조 때 펴낸 『여지도서』에 처음 보인다. 충청도 청주목의 산천조에 당이산과 와우산을 동쪽 1리와 2리로 달리 보았고, 고적조에는 동쪽 2리에 산성이 있다고 하였다. 고적조 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여지도서』의 내용만 본다면 당이산과 와우산을 다른 산으로 분명히 구분하고 있어, 당이산=당산이라는 인식이 비로소 자리 잡았다.
 

『대동여지도』 청주목 부분(겹으로 둥글게 표시한 청주읍성 바로 동쪽이 와우산이다. 산자락의 표시는 옛 성터를 표기한 것이다.)

여기서 당이산은 와우산으로부터 와서 청주 읍치의 좌보左補라 하였다. 또 와우산은 상령산上嶺山으로부터 와서 향교의 주맥主脈이라 하였다. 주변의 산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연이은 산줄기로 보고 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산경표』 이래의 지리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백두대간은 속리산에서 나뉘어 남에서 북으로 굽이쳐 한남금북정맥을 이룬다. 청주는 한남금북정맥의 서쪽, 미호천을 넘지 못하고 너른 뜰과 산자락 사이에 위치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동여지도』는 이어진 산줄기와 그곳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 속 청주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와우산의 성터

삼국이 국가를 세운 후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의 성곽은 우리 지역에 적지 않다. 그중 백제가 쌓은 산성으로 부모산성과 목령산성, 그리고 와우산성이 비교적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부모산성은 신라가 거듭 성벽을 쌓으면서 지금도 완연한 성벽의 자취가 남아있다.

반면 와우산성은 발길에 차이는 성돌과 산의 정상과 줄기를 깎아낸 정도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고려 초기 왕건王建이 청주에 행차하여 성을 쌓은 기록이 눈에 띈다. 919년(태조 2)과 930년 청주에 성을 쌓았다. 왕건은 왜 청주에 성을 쌓았을까. 918년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청주 출신 인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그리고 왕건이 왕위에 오른 후 웅주(공주)와 운주(홍성)이 견훤에게 항복하면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후백제나 신라로 가는 빠른 길에 청주가 있었다. 왕건은 청주를 진정시키지 않고서는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룰 수 없었다. 끊임없는 청주 사람들의 반란과 후백제의 공세를 지켜내기 위해 이곳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왕건은 이곳에 성을 쌓고 민심을 어루만진 이후에야 비로소 후백제와 겨룰 수 있었다. 그 자취가 와우산성에 다시 쌓은 석축의 흔적이다.
 

당산의 판축 토성과 기초석(2013년). 가지런히 돌을 일렬로 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았다.
토성 위에 돌로 여장을 쌓았다(2013년).

2013년 발굴조사로 밝혀진 성벽의 구조

2010년에는 도로공사로 성벽이 잘릴 뻔한 적도 있었다. 오늘도 도로 공사를위한 소음이 산성에 오르는 내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그해 겨울 국립청주박물관 등이 펴낸 『청주 와우산성』 보고서를 통해 우리 가까이에 있던 와우산을 조금더 이해할 수 있다. 1980년 간단한 조사가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비교적 자세한 산성의 자취와 대략적인 현황은 알 수 있다.

와우산성은 해발 353m의 정상을 감싸고 서남쪽 방향의 계곡을 따라 길게 뻗은 길이 4,857m의 성벽이 남아있다. 산성은 내성과 외곽의 나성 부분으로 구분하여, 내성은 둘레 3,069m, 나성으로 연결된 외곽을 포함하면 7~8km로 보고 있다.

먼저 내성은 세 부분으로 나뉜 3곽의 성벽을 확인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2곽의 서벽에서 3·1공원에 이르는 외성과 문수암 동쪽에서 이어져 향교의 뒤쪽을 지나 당산으로 이르는 외성이 있다. 이 두 외성은 고려 초의 나성으로 볼수도 있다. 다만 당산의 토성을 독립 산성으로 본다면 이때에 와우산성과 당산을 연결한 나성을 쌓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저 삼국시대에 처음 쌓고 고려 초에 고쳐 쌓았다는 정도로만 알려진 옛 성벽에 대한 조사가 2013년 말 비로소 첫 삽을 떴다.

와우산성 성벽은 흙을 켜켜이 쌓은 판축板築 토성으로 처음 쌓았다. 그 뒤 언젠가 토성을 정리하고 그 위에 돌로 기초석을 놓고 여장女墻을 쌓았다. 그리고 토성을 쌓기 이전에 이미 산줄기 곳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 위의 토성, 그 위에 다시 석축의 산성을 쌓은 5~6백 년 시간의 두께가 그곳에 있다.
 

토성 밑에서 원삼국시대 토광묘가 있다(2013년).
1971년 와우산에서 발견된 작은 동종銅鐘으로 음통을 감싼 뚜렷한 용의 새김과 2구의 보살상, 천판 위의 입상화문 등은 고려 후기 범종의 특징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높이 34.8cm

와우산에 터를 잡은 사람들

와우산엔 옛 성터와 산자락에 많은 자취가 남아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와우산 곳곳의 평탄지에 있었던 옛 절터이다. 지금도 옛 절터에 새로이 세운 사찰이 적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은 목우사지 석조여래입상이다. 원래 수동 목암사 터에 있던 것을 최근 봉황사로 옮겨왔다.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의 불상이라고 한다. 앞서 1971년 천흥사天興寺 혹은 흥천사興泉寺 터로 전하는 절터에서 구리로 만든 종이 발견된 바 있다.
 

목우사지 석조여래입상.

대표적인 터가 산 정상 가까이 교육청에서 만든 생태공원 자리이다. 이곳 평탄지는 계단 모양을 이루며 절터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남쪽과 서쪽 계곡 안쪽으로는 사찰이 유지되고 있다. 통일신라~고려시대 와우산 자락에 들어섰을 고찰을 상상할 수 있다.

불교가 탄압 받던 조선시대에는 이전까지 향화香火가 이어지던 대부분의 사찰이 폐허가 되었다. 조선시대 와우산은 단지 청주의 진산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가뭄이 오래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보다 앞서 대성동 절터로 알려진 곳에 향교가 들어섰다. 조선시대 3단壇 1묘廟의 하나로 중요하게 여기던 문묘文廟 곧 향교는 억불숭유 정책의 상징인셈이다. 지금도 대성전을 오르는 계단 한쪽에 석탑 옥개석이 뒤집힌 채 놓여 있다.

와우산의 남쪽 자락은 여흥민씨의 묘가 여럿 있다. 굿당이 많은 용담동 가좌골을 따라 백운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여흥민씨분산驪興閔氏墳山’이란 새김글이 보인다. 이미 당산에 자리한 민영은閔永殷의 묘가 있어 여흥민씨의 자취를 알 수 있으나 그보다 먼저 청주에 일찍 자리 잡은 민씨들의 자취이다. 여흥민씨 민반閔泮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처음 청주 노천蘆川, 지금의 남이

면 양촌리에 정착했다고 한다. 와우산 남쪽 자락에는 1973년 서울에서 옮겨온 그의 할아버지 민휘閔徽와 아버지 민건閔騫의 묘가 있다. 그리고 민반의 손자 민황閔潢과 그의 아들들의 묘가 이곳에 있다.
 

청주향교 대성전 앞의 석탑 옥개석은 이곳이 옛 절터임을 말해준다.
‘여흥민씨분산’ 새김돌.

오늘, 다시 와우산에 오르며

와우산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도심 가까이에 완만한 높이와 초록이 완연한 공간으로 산을 오르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옛 성터가 있고 청주의 역사를 품은 공간이란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많은 발길에 패인 옛 성터의 자취는 맨살을 그대로 드러낸다. 산이 좋아 찾는 사람이 많을수록 역사의 자취는 더욱 훼손되고 있는 현실이다.

와우산은 청주의 상징이었다. 자연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생채기를 면할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영일동맹 이후 조선 병탄에 기여한 대가였을까. 청주를 굽어보는 명당에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성당이 들어섰다. 나아가 미·일 간의 가쓰라-테프트 밀약 이후 한층 식민지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등산로에 드러난 성벽.
청주 성공회성당(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9호)는 1935년 구세실Cecil Cooper 주교가 32칸 크기로 세웠다. 성당은 팔작 지붕 목조 한옥이나 벽체와 내부는 서양식이다. 자재의 일부는 영국에서 직접 들여왔다.

그리고 이곳 와우산과 당산은 일제강점기에 신사神社가 자리했다. 당산의 명장사와 와우산의 대한불교수도원이 바로 신사터다. 해방 후 적산자본을 종교계가 수용한 결과이다. 물론 대한불교수도원 자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절터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그때의 연화대좌가 남아있다. 시대 흐름 속에 신앙의 대상이 바뀌던 곡절이 남아있다.

덧붙여 와우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표충사를 꼽을 수 있다. 원래 읍성 북문 안쪽에 있던 것을 1939년에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열녀로 추앙된 기생 해월의 묘가 있던 곳이다. 표충사는 1728년 무신란戊申亂의 배움터로 빠지지 않는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 때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본정통’의 확장으로 도심 바깥으로 밀려난 것이다.

삼일공원에서 3·1만세운동의 함성을 되새기며 ‘우암산순환도로’를 걷는다.

이 도로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3년간 노임 소득사업으로 건설한 것이다. 1순환로 생태터널 직전 도로 위에 당시에 세운 표지석이 있다. 당시의 청주시장을 비롯한 관계자 명단, 공사기간, 사업비 등 소소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해월열녀각은 원래 표충사와 함께 읍성 북문 안쪽에 있었으나 함께 옮겨왔다.
열녀 해월의 묘소. 1960년 표충사 가까이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우암산공원도로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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