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1917년 3월 2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이 날은 보재 이상설이 순국한 날이다. 우리 나이로 48세였다. 대통령 탄핵심판 마지막 변론과 그 후속 조치로 나라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지금, 그가 온 몸을 던져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대한민국은 어느덧 길을 잃었다. 한쪽은 혁명을 으름장 놓으며 권력을 도모하고 있고 또 한쪽은 입에 거품을 물며 민란과 내란을 외쳐댄다.

누군가는 말한다. 같은 국민끼리의 정서적 동족상잔이 지금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고... 우리나라 최대 비극이라는 6.25도 설령 그것이 북한 특권층의 작위로 저질러지고 또 유도됐다고 할지라도 그 배경엔 남북이라는 지역적 괴리감, 그리고 민족적인 이질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요즘은 눈만 뜨면 마주하는 같은 직장, 같은 조직 내에조차 서로 절벽이다. 가정의 밥상머리에서도 국정농단과 탄핵 얘기만 나왔다 하면 십중팔구 서로 언성이 과격해진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나라의 모든 공조직은 한낱 노리개로 전락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저럴 바에야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국민적 비아냥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고 정의를 곧추세우겠다던 특별검사는 일개 무지렁이들의 종주먹 앞에서 화형당하는 처지가 됐다.

이 나라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헌법재판관은 ‘밤길을 조심해야 하는’ 살해위협과 집단테러의 목록에 올랐는가 하면 국회와 사법부, 언론은 대통령의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한 죄로 저들에 의해 단두대에 올려질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다. 급기야 엊그제는 충북에서 여당의 한 지방의원에 의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졸지에 미친개로 매도돼 역시 반드시 사살돼야 할 대상이 됐다. 이상설 순국 100주년에 빚어지는 나라의 현실이 그저 안타깝고 참담할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에 대해 늘 문외한을 탓하지만 그래도 이상설을 접할 때마다 이 한가지 사념(思念)은 분명히 유지하려 한다. 우리가 너무 무심했다는 것, 국가가 이래도 되느냐는 이상설을 향한 일종의 자책과 죄책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이상설 독립운동의 최대 근거지였던 러시아 연해주 현지를 방문하고선 더욱 확고하게 굳혀졌다.

우리에게 이상설은 여전히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됐다가 조국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리지 못하고 좌절한 불운의 독립운동가로 각인돼 있다. 역사책의 기술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에야 그의 민족교육에 대한 헌신과 정치적 사상 등이 재조명되면서 인물평가 또한 많은 부분이 보완되고는 있지만 이상설은 이러한 정형화된 프레임을 휠씬 뛰어넘는 역사적 업적을 숱하게 남기고 갔다.

우선 이상설은 율곡 이이를 계승할 만큼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27세에 성균관 초대 관장에 오른 유학자였는가 하면 서구에 앞서 고등 수학이론을 정립한 수학 천재로도 불렸다. 단순히 독립운동만 한 게 아니라 직접 광복군을 양성했는가 하면 1914년엔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라는 망명정부를 건립해 정통령을 맡은 한 나라의 수반이기도 했다.

그가 1905년 을사늑약을 시발로 순국할때까지 12년 동안 끊임없이 주창한 것은 독립사상에 근거한 동양평화론으로 당시 “극동의 영구평화를 위해선 한국의 영세중립이 필요하다”는 그의 역설은 일제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세계에 알리면서도 대한제국의 주체성을 확고히 하는 정치사상의 압권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러한 전방위적인 업적이 후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처지에 이 세상에 그 무슨 흔적을 남기겠는가”라는 유언에 따라 그에 관한 모든 행적과 기록들이 불태워졌고 시신도 화장되어 그가 활동한 연해주 우수리스크 수이픈 강에 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친일파를 기점으로 하는 역대 집권세력의 의도적 홀대에 있다.

정부수립 초기엔 이승만정권의 정통성을 꿰맞추려는 세력들에 의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과 그에 따른 결과물, 예를 들어 망명정부의 활동상 등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이상설을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은 1990년 9월 30일 한-러 수교 이후에나 학자들에 의해 실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한다. 독립운동의 전진기지였던 연해주가 우리나라 사가들에 의해 본격 베일이 벗겨진 것도 이 때부터다. 역대 정권 중 연해주를 방문해 독립운동의 혼을 기린 대통령은 노무현이 유일하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이상설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있는 인물이 최재형이다. 지난날 역사교과서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최재형이지만 실제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代父) 쯤으로 활약한 당대 최고의 독립투사였다. 1869년 함경도에 대홍수가 덮치자 아홉 살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한 그는 성인이 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후 재산 대부분을 독립운동에 투입하며 여러 조직을 이끈다. 연해주에서의 모든 독립운동이 그의 군자금으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감정은 그의 활동이 마치 전설적이라는 것, 그만큼 통이 크고 대국적이었다.

최근엔 안중근 의사의 거사도 최재형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최재형이 재산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고 또 그가 관여한 ‘동의회’라는 조직이 러시아로부터 무기와 군복 등을 구입해 치밀하게 준비, 국내 진공작전의 일환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것이다. 최재형 역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1920년 4월 7일 일본군에게 잡혀 62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당시 그는 피신하라는 가족의 독촉에 “내가 도망치면 너희들이 죽는다. 나는 살건 다 살았다. 너희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치겠다”며 스스로 죽음 앞에 섰다.

우리나라는 1962년 최재형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그에 대한 선양을 갈음하다가 최근에야 조금씩 더 관심을 갖게 됐다. 2007년 대한민국 재외동포재단 명의로 도로 옆에 방치되었던 최재형 고택이 매입돼 기념관 조성이 추진중이고, 정부는 지난해 8월 15일 그의 손자 최발렌친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했다. 최재형이 그동안 얼마나 묻혀있었던지 이 손자조차 87년만인 2007년에야 처음으로 할아버지 제사를 지낸다. 만약 국정교과서가 획일적으로 학교 현장에 적용된다면 최재형 같은 인물은 앞으로도 계속 묻힐 수밖에 없다. 친일파들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여전히 아웃사이더다.

이상설과 최재형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어쩔 수없이 오늘의 현실을 오버랩시킨다. 한 사람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끝내 나라를 재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몸까지 태워 흔적을 지웠고 또 한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오로지 모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도 마지막엔 가족을 대신한 장렬한 죽음까지 택했건만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는 저 추악한 몰골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것이다.

탐욕스러운 강남 아줌마에게 유린당하며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국정을 마치 아프리카 미개국 수준으로 변질시킨 당사자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오랏줄을 받는 이 순간에도 오로지 자기만이 살기 위한 처절한 독기를 뿜어대고 있다. 탄핵심판 마지막 변론에서 제기된 그의 답변 “결코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았고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을 위해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그 역설(?)을 듣는 순간, 나도 인간에 대한 살기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면....이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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