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에게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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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에게 빠지다
  • 충청리뷰
  • 승인 2017.02.2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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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있는 감동을 주는 만화 <도련님의 시대> <고독한 미식가> <열네살> <아버지>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백창화 괴산숲속작은책방 대표

백창화 괴산숲속작은책방 대표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저녁 먹을 시간이 되도록 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엄마는 동네 만화가게로 나를 찾으러 오곤 했고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엄마에게 붙들렸다. 그토록 ‘불량한’ 곳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 앉아있던 내 등짝을 후려치며 엄마는 나를 집으로 끌고 갔다. 어른이 되어 내 맘대로 돈과 시간을 쓸 수 있게 되면 만화든 소설이든 내가 원하는 책을 무한히 사들이고 원 없이 읽으리라, 이것이 내 어릴 적 큰 소망이었다.

어른이 되어 돈을 벌게 되자 소원대로 내 서가엔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갔고 그중엔 만화책도 적잖이 있었다. 지금도 만화책을 사는 건, 내게 즐거운 취미생활 중 하나인데 최근엔 특히 예술적 작화가 강조된 유럽의 그래픽 노블이 많이 번역 출판되면서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고급한 만화 시장이 열리고 있다. 만화가 단순히 가벼운 오락거리가 아니라 웬만한 인문서나 문학서보다 더 품격있는 감동을 전해주는 경우도 많다.

일본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의 <도련님의 시대>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혹독한 근대 및 생기 넘치는 메이지인’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1900년대 전후(메이지 시대), 전통적 가치와 서구적 가치가 충돌하던 세기말의 혼돈을 지식인들이 어떻게 견디어내며 새 시대를 열었는지 실존하는 문인과 지식인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만화다.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읽어내기 어렵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우리에겐 꽤 유명한 작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일본의 근대와 인물들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만화는 낯설기만 하다. 그럼에도 한 장 한 장 일일이 주석을 대조해가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역동적인 삶이 깊은 감동을 안긴다.

몇 달에 걸쳐 5권의 만화를 다 읽고 난 후 자연스럽게 든 생각은 우리에게도 이 시대를 조망한 이런 멋진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문인, 지식인들의 고뇌와 번민이 역사라는 운명 앞에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그것을 치열하게 그려내 우리 앞에 되살려주는 그런 훌륭한 작품을 만나고 싶었다.

 



그는 별이 빛나는 하늘에 도달했을까


무엇보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는 마음을 울린다. <고독한 미식가>는 일본에서 혼밥과 혼술 열풍을 일으키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열네살>과 <아버지>에서 그는 고향을 등지고, 부모를 떠나 대도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이 어떻게 자신의 외로웠던 어린 시절과 화해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이것은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늙은 부모의 고통과 고독을 이해하게 된 우리들 중년의 이야기이며, 가족이라는 부조리를 불우하게 느끼고 끝없이 자기만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었던 우리들 청춘의 이야기이며, 이제는 돌아와 고향 앞에 선 귀향의 고백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고향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돌아오는 것이라고...”(<아버지> 중에서)

1947년 돗토리 현에서 양복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생 때부터 만화에 심취했던 작가. 일본 만화의 전통 위에 서 있지 않은 아웃사이더였음에도 일본에서 만화가협회상을 비롯한 온갖 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발, 스페인 만화국제전 등에서 수상하며 유럽에서 각광받았던 만화가.

그가 지난 2월 11일, 향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늦은 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뜬 그의 부고 기사를 읽으며 나는 <신들의 봉우리>를 떠올렸다. 설산을 등반하는 산악인들의 이야기인 이 만화에서 내 머릿 속 깊이 각인되어 있던 한 장면.

“후카마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은 밤이다. 무수한 별이 반짝이는 하늘...정적이 흐른다...한 사나이가 에베레스트의 눈 덮인 능선을 걸어가고 있다.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다. 후카마치에게는 그 사나이가 산꼭대기에 오르려 하고 있다기 보다는 별이 빛나는 하늘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였다...그 사나이가 꼭대기에 도달했는지 못했는지 언제나 그것을 알기 전에 잠에서 깨어난다.”(신들의 봉우리 1권 중에서)

다니구치 지로, 그가 별이 빛나는 그곳에 도달했는지 못했는지 오늘 밤 꿈속에선 끝까지 깨지 말고 알아낼 수 있기를 나는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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