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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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단상
  • 육정숙 시민기자
  • 승인 2004.10.13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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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의 담금질이 끝난 가을 들녘은 맑은 햇살을 온몸으로 품고, 익어가는 열매들의 향기로 풍요롭다.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비바람 속을 지나왔기에 이토록 벅찬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는 걸까! 발밑에 들풀들이 갈바람에 온몸을 스산하게 흔들어댔다. 초록빛 수분들이 어디론가 빠져나가 사위어드는, 애련한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생성을 위한 아픔이기에 가슴 저며 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눈으로 마음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 가을 속에서 오히려 나는 텅 빈 가슴으로 서 있다. 빈 가슴 속을 소용돌이치고 있는, 이유 없는 허전함은,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의 사슬로 나를 조여 왔다. 그럴 땐 아무런 미련 없이 모든 걸 놓아두고 어디론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것은 나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에,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언젠가 다가올 소멸을 향한 이별 연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평소 이웃집에 알고 지내는 할머니 한분이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면 따스한 눈길로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할머니는 날마다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매일 오전 열 시가 되면 어김없이 리어카를 끌고 종이박스를 거두러 나가셨다. 언제쯤이었을까! 그녀도 박 속 같은 흰 피부에 발그스레한 볼을 지녔던 시절이 있었을 게다. 지금은 그 얼굴로 깊게 패인 삶의 고랑이 흐르고 살과 피가 새어 나간 살가죽으로 쭈글쭈글한 기다림만 남아 온종일 잿빛도시를 헤맸다.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구원인 것처럼, 힘겨운 삶 속에서 늙은 어머니는 아들이라는 빛을 향해 서 있었다. 아침이 오면 서둘러 거리를 헤맸다. 어둠이 내리면 정신없이 돌아와 아들을 위해 이부자리를 펴놓고 기다림으로 초췌해져 가는 육신은 밤새 기침소리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뱉어내며 새벽을 열곤 했다.

할머니는 하늘이 맑고 투명한 날 영원히 떠나셨다.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아들과 세상을 향해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해야 했던 여인! 그 날 도로 가에 코스모스 꽃잎들은 할머니의 마지막을 증언하면서 설움에 복받쳐 온몸으로 울었다.

젊은 나이에 혼자되어 애지중지 키우던 아들 하나! 그 아들이 열아홉 될 무렵 집을 나가 지금껏 소식이 없었단다. 아들 하나 키우려고 험한 세상 무슨 일인들 마다했을까? 젊고 예뻤었기에 물고 드는 소문이야 그 여름날 무성하던 나뭇잎처럼 팔랑거렸을 것이다. 어린 아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였던 만큼 어머니를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변명조차 할 수 없었던 기다림 속에 갇혀, 모진 세월을 견디던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어찌 할 것인가!

무성했던 나뭇잎들이 새로 돋고 떨어지던 숱한 세월들을 켜켜이 가슴에 묻고 흙으로 돌아 간 어머니 앞에, 이제야 돌아와 고개 숙이고 서 있는 아들의 두 어깨로 가을햇살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할머니가 불쌍해서 어찌하느냐는 이웃들의 푸념을 들으며 나 역시 엉킨 실타래 같은 내 삶을 돌아본다. 내 삶의 길 교차로는 엉키고 부딪치고 깨지고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혼자보다 둘이 나은 우리들의 인생 여정, 그리하여 미운 정 고운 정 들고 나다 보면 용서도 하고 사랑도 하는 것이다.

시간은 어느새 느티나무의 아름다운 수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무던히도 잘 견뎌 낸 탓인가. 여린 가지로 풋풋한 어린 나무보다 그 자태가 곱고 우아한 것은 질곡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다지고 누르고 삭히며 속내를 다듬고 또 다듬어 보여 지는 모습이리라.

가을은 넉넉하고 풍요롭지만 한편, 낙엽으로 돌아가 흙에서 썩어 또 다른 생명체의 자양분으로 돌아가는, 희생이 따르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이다. 떠나고 보내는 일은 언젠가 때가 되면 누구나 다 겪어야 할 일이지만 아직 진정 떠나보내는 슬픔, 그 그리움을 겪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가을이 마냥 허허롭기만 하다.

눈에 띄지 않아 잊고 살아야 했던 작은 들풀들이 발 아래서 갈바람 따라 떠날 채비로 분주하다. 가던 길 돌아서 쪼그리고 앉았다. 살가랑 살가랑 바람에 사그라지는 작은 들풀들을 보듬으며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할 시간들이 참으로 짧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꽃피는 봄이 오면 이 자리에 푸른 싹은 다시 돋지만 그들은 이미 지금의 이 들풀들이 아니기에...

우리들의 인생은 고독으로 빚어 진 술잔이다. 기쁨도 노함도 슬픔도 즐거움도 모두 한낱 불다 그칠 바람인 것을. 풀지 못한 삶을 안고 이승을 떠나신 할머니와 방황하다 돌아온, 그녀의 아들과 나,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이들과 함께 이 가을 날, 어설픈 내 인생의 포도주가 담긴 술잔을 높이 들어 인생무상에 대하여 건배를 외치고 싶다.

할머니의 평온한 숨소리 듯 바람 한줄기 살랑 내 귓전을 더듬는다. 내 안에서 무수히 자라는 숱한 회한들을 뽑아내고 대신에 용서와 사랑의 씨를 뿌리는 이 가을이고 싶다. 그 그리움이, 그 사랑이 차마 영원 하지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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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2004-10-17 20:49:03 , IP:*****
육작가님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이가을날의 서글픔이 아려오네요.
늘 건강하시고 작품 활동에 정잔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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