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 한덕현 충청리뷰 발행인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는 속지 말고 일본은 (반드시) 일어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우리나라가 주변국과 외교적 마찰이라도 빚게 되면 어김없이 출몰하는 단골 소재가 된지 오래다. 여기에 현재 우리나라를 둘러싼 주요 외세들 중 중국이 빠진 점도 이채롭다. 중국이야말로 과거 역사를 통해 오랫동안 숙명의 애증을 나눈 관계인데도 말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국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자 지난 15일 천안함기념관을 찾은 반기문에게 기자들이 박근혜 외교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잘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이 돌아 왔다. 잘 한다 못 한다의 단정적인 말 대신 ‘...있다고 생각한다’ 식의 간접화법이 건네지자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SNS를 통해 “특유의 기름장어 어록이 추가됐다”고 비꼬았다.

아닌게 아니라 현재 돌아가는 주변국의 상황을 보면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엔 속지 말고 일본은 일어선다’를 몇 번이고 곱씹게 된다. 엇비슷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혈맹이라는 미국과는 사드배치와 트럼프 당선을 계기로 서로가 어디까지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졌고, 푸틴과 트럼프 사이의 각별한 스킨십은 향후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게 분명하지만 러시아는 한반도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도 쉽사리 촉수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침략적 군국주의 부활을 목표로 헌법개정까지 들고나온 일본은 갑자기 미국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자위대 전력을 수직상승시키느라 안달이 났다. 동아시아 패권의 꿈을 못 버리는 일본은 의심의 여지없이 지금 일어서는 중이다. 이 와중에 친 미와 친 강대국 성향으로 유엔 사무총장 당시 ‘미국의 푸들’이라는 혹평을 받은 반기문은 귀국하자마자 강력한 대권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임기 초반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외교만큼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본인의 통치이념인 ‘원칙과 신뢰’를 앞세워 초장부터 북한과 일본 등을 향해 강경책을 구사한 것이 나름대로 국민들에게 어필한 것이다. 반기문의 “잘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평가가 사실 이 때쯤 나왔으면 대중의 호응을 받고도 남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금 박근혜 외교가 쪽박을 찼다고 난리다. 탄핵 정국 때문이 아니라 박근혜의 단견, 즉흥적 선택이 근본적 원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외교무대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특정 국가와의 단정적인 관계설정이다. 특히 군사력에서 주변 강대국에 비해 절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로선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는 등거리 외교가 최선은 아니더라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차선책은 될 수 있다. 실제로 박근혜 정권 이전까지는 미국과 일본을 크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러시아와 중국과도 별 탈없이 지내면서 외교적인 안녕기를 구가(?)했다. 건국 이래 최대 패착이라는 이명박의 자원외교도 나라 살림을 거덜냈을 망정 우방과의 이해관계나 분쟁은 키우지 않았다.

한데 박근혜 외교는 본인이 강조하는 원칙과는 동떨어지게 지나칠 정도로 돌발적이었다. 난데없이 시진핑과 함께 천안문에 올라 미국과 일본의 염장을 지르더니 돌연 전혀 예상치 못한 사드 배치결정으로 이번엔 중국의 뒷통수를 친다. 아베의 정상회담 구애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이 불과 엊그제인데 말도 안 되는 졸속의 위안부 합의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도발에 대한 응징을 이유로 하루아침에 개성공단을 폐쇄시킨 처사 또한 박근혜의 외교적 판단력에 국민적 의혹만을 배가시킨 대표적 사례가 됐다. 통치의 선명성을 곧추세우겠다고 해서 자기 국민들의 안전과 생존을 이런 식으로 쉽게 대한다면 국민들의 불안감은 오히려 더 커질 뿐이다. 이는 지난 연평도 피격 당시 영토를 침략당하고서도 즉각 응징을 못하고 우왕좌왕한 이명박의 ‘밴댕이 리더십’보다도 오히려 더 옹색하다. 아직은 억측으로 남아있지만 만약 박근혜의 이런 결정들이 최순실에 의해 좌지우지 됐다면, 글쎄다 우리로선 이게 나라냐를 또 한번 입에 올릴 수밖에 없다.

외교에서 함부로 단정하는 것의 위험성은 그럴 경우 필히 배신으로 되돌아 온다는 역사적 필연성만으로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우리의 최고 혈맹이라는 미국과의 관계만 봐도 그렇다. 1905년 11월 16일의 을사늑약은 미국의 배신이 결정적 배경이 됐다.

당시 조선은 1882년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철통같이 믿고 있었지만 미국은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국을 일본에 팔아먹는데 동의한다.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사이에 체결된 이 밀약은 표면상으로는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확인하며,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로 되어 있지만 속내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역시 한반도를 통해 해양 진출을 꾀하려는 러시아를 제어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고자하는 미국의 계산이 철저하게 작용했다.

미국의 배신은 2차 대전 후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미국은 끝까지 하나의 반도를 염원하는 통일론자들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함으로써 끝내 남북 분단의 단초를 제공한다. 광주학살 때도 미국은 우리나라 민주화세력의 여망과는 무관하게 신군부를 택해 헌정질서를 농락케 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재확인됐지만 미국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여 운영되는 국가에 불과하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태어났고 전쟁으로 대국이 되었으며 예나 지금이나 전쟁으로 나라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 최강국임을 안다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하다. 반미(反美)를 하자는 게 아니라 종미(從美)와 숭미(崇美)를 버리고 용미(容美·用美)를 통해 이젠 주인된 입장에서 우리의 나아갈 길을 찾자는 것이다.

굳이 이 시점에서 거론한다면 앞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현재로선 최고 잘나가는 두 사람 즉 문재인과 반기문의 외교적 통치력을 개관적인 입장에서 한번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끊임없이 색깔론에 휘말리는 문재인의 지금까지 역정과, 미국과 강대국의 푸들이라는 반기문의 이제껏 이력 중 과연 어느 것이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는 지는 이제 우리가 알아서 판단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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