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약국 1호로 문 열어 ‘55주년’, 삼성약국 조진호 약사
병원 드물던 시절 직접 만든 연고로 전국적 명성 얻기도

충북대학교의 전신은 도립 농과초급대학이었다. 6.25의 포성이 천지를 흔들던 1951년에 2년제로 개교해 1953년 4년제 청주농과대학으로 승격했다. 당시에는 캠퍼스를 마련하지 못해 내덕동 청주농고 교사(校舍)를 빌려 쓰는 상황이었다. 농고 학생들이 ‘청주농과대학은 나가라’고 데모를 하고, 밤새 책걸상을 운동장에 내놓기도 했다니 수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교명을 충북대로 바꾸고, 개신동시대를 열게 된 것이 1956년이었다. 농업계열 학과만 있던 상황에서 농과가 아닌 학과가 신설되면서 농과대학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충북대가 된 것이다.

1956년 충북대의 역사를 바꾼 신설학과가 바로 ‘약학과’다. 충북대 약학과 1기는 전설의 56학번이다. 병원은커녕 약국도 드물던 시절, 약국이라야 소위 ‘약종상(藥種商)’들이 일반약품들만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충북대 약학과 1기 졸업생이 약사가 되어 나오자 청주시내 약국판도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1기들 중 아직도 현역 약사가 있을까?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에서 삼성약국을 운영하는 조진호(1938년생) 약사는 충북대 약대 56학번 중에 아직도 약사 가운을 입고 있는 두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우리 입학하면서 농고에서 개신동으로 옮긴 거야. 난 시내에서 개신동까지 걸어 다녔지. 그때야 가는 길이 산길이었어. 경치 참 좋았지. 꾸밈새 없는 자연이 너무 아름다웠어. 약학과 56학번이 서른다섯 명인가 그랬어. 많이들 죽고 이제 아홉 명 남았나? 그 중에 아직도 약국 하는 사람은 나하고 요 옆에 한독약국 하는 친구, 이렇게 둘밖에 없어. 나는 학교 졸업하고 1962년 서울 돈암동에서 미화약국을 개업했지. 그때만 해도 서울에도 약국이 많지 않았어. 돈암동에 딱 두 개 있었으니까. 거기서 계속 약국을 하는 건데 1965년엔가 청주로 내려왔지.”
 

고향이 그리워서 내려왔단다. 청주 ‘일정목(1丁目, 거리를 뜻하는 왜식 용어)’에 삼성약국을 개업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삼성약국이다. 약국이라야 다들 일반약품만 파는 상황에서 약을 지어주는 조제약국 1호였던 셈이다. 일정목은 지금도 남아있는 청주약국이나 과거 십자약국 등이 있었던 성안길 지역을 말한다. 시내에 있던 삼성약국이 내덕동 옛 연초제조창 건너편으로 오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무슨 노인회 관계자들이 장날 우리 약국을 찾아온 거야. 약국이 몇 개 있지도 않았지만 죄다 시내에 있으니 이 양반들이 불편한 거야. ‘제발 우리 동네로 와 달라고, 도와 달라’고 해서 자전거 타고 여기를 와보게 된 거지. 그때는 여기가 허허벌판이었어. 이 노인양반들이 살림집 딸린 가게를 알아봐 줘서 결국 이리로 오게 된 거야. 그게 언젠지도 잘 기억이 안 나네. 박정희 대통령 때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세월이 무려 19년이다. 도대체 언제쯤 내덕동으로 왔다는 말인가. 얘기를 듣자 하니 1970년대 초중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진호 약사는 내덕동으로 온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담배공장에서만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일하고, 아픈 사람도 참 많던 동네였단다.

“병원이 없으니까 중병(重病) 환자들이 다 약국으로 왔어. 지금 같이 감기 뭐 이런 게 아니라 폐결핵, 나병환자, 옴 걸린 사람, 임질·매독 같은 성병까지…. 약 사먹을 돈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어. 누가 뭐 외상 달래서 주나? 좋은 일 하려고 한 것도 아니지만 아픈 사람 약 안 줄 수가 있어야지. 돈 있는 사람들한테는 받고, 없는 사람한테는 못 받고 그랬던 거지.”

그래도 벌 만큼은 벌었던 것이 처음 시작한 자리에서 현재의 내덕동 292-2번지로 옮겨 1층에서는 약국을 하고, 2층에서는 살림을 했다. 그러다가 현재의 4층 건물을 올렸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래도 메디컬 빌딩이다. 2,3,4층을 모두 병의원에 임대를 줬을 때는 약국도 전성기였다. 관리약사 서너 명을 두고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현재는 2,3층이 비면서 조진호 약사 혼자 약국을 지키고 있다. 조진호 약사는 병의원을 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다.

“의약분업 전에는 약사들이 의사노릇도 했잖아. 나도 뭔가 특기가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소문이 날까, 고민하다가 피부환자를 고치는 쪽으로 연구를 했어. 이러저런 피부병에 맞게 연고를 만들어 팔았는데 거의 만능으로 고쳤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어. 지금도 ‘삼성약국 연고 왜 안 파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런 일도 있었어. 청주 중앙정보부에 간부급이 서울서 내려왔는데 이 사람 얼굴에 문둥병 같은 게 생긴 거야. 그래서 밤에도 큼지막한 선글라스 같은 걸 끼고 다니고. 내가 고쳐줬잖아. 서울서도 못 고친 걸 한 달여 만에 완치 시켰지.”
 

무용담이 이어졌다. 그 중앙정보부 간부의 피부질환은 ‘국○○’이라고 당시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던 피부과 전문의도 고치지 못한 것이었는데, 자기가 고친 것이라고 했다. 서울에 약국을 차려준다는 것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했다. 숨이 끊긴 줄 알았던 신생아를 되살린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몸이 약해 죽기를 바랐던 아이를 살려놓았다고 책망을 듣기도 했단다. 내년이면 개업 55년째다. 그 진진한 지난 날 중에 잊히지 않는 이야기들만 모은다고 해도 천일야화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현역이다. 조제약을 건네면서 같이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 장거리운전은 피하라는 얘기 등 꼼꼼하게 복약지도를 해준다. 젊은 약사들로부터는 저렇게 꼼꼼한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사진은 찍지 말아. 늙은 사람들 사진 찍는 거 아냐. 사진 찍으려면 내가 젊었을 때 왔어야지. 내 약사면허번호가 전국에서 4023번이야. 충북에서 제일 빠른 사람은 서울대 약전 나오고 옛날 제일은행 옆에서 순천당 했던 김명직 씨 일거야. 의사보다도 유명했으니까. 그러고는 우리 또래라고 봐야지. 나부터 시작해서 스무 명쯤 되니까 ‘회(會)’도 만들어지고 했던 거지.”

충북대 약학과의 살아있는 전설로부터 55년의 요약을 듣는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현역이라는 것이다. 삼성약국의 전성기는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비어있는 2,3층에 병의원만 입주한다면 말이다.

토박이열전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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