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과 ‘밀당’ 끝에 90달러 깎았으나 이슬람 사원에서 틀어대는 방송 때문 고역
질서의식, 환경의식, 위생관념 등 보며 부정적 인식 바꾸고 나면 또 다른 일 발생

안남영의 赤道일기
전 HCN충북방송 대표

변화라―. 이는 익숙한 것과의 작별, 낯선 것과의 부대낌이리라. 이곳 생활이 바로 그렇다. 해외자원봉사 지원 목적이 ‘삶의 변화’였으니 내 의도는 일단 성공적이다. 가족, 눈에 익은 풍경, 입에 맞는 음식, 버퍼링 없는 언어소통, 내게 무료함을 용납하지 않는 지인들…. 그 속에 젖은 안온한 삶에서 송두리째 탈피했으니 말이다.
 

▲ 근무하는 학교. 정식 명칭은 ‘SMKN4 반자르마신’(반자르마신 국립 제4기술고등학교)이다. 날 일(日)자 형태의 교사 안 운동장은 안마당처럼 좁지만 각종 행사와 체육활동 장소로 쓰인다.

‘사람에게 급격한 변화는 보약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기회가 나로서는 과연 행운일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며 각오를 다졌다. 작년 12월1일 임지인 반자르마신으로 올 때 얘기다. ‘부임’이란 말은 직분을 생각하면 과분하고 그저 ‘파견’이라는 말이 맞겠다. 파견 직후 맞닥뜨린 모든 상황은 그야말로 시련이었다. 자카르타에 머무는 동안 조금은 감 잡았다 생각했다.

그러나 한적한 중소도시의 민낯은 또 다른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짊어진 본연의 임무가 무겁게 다가온 데다,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영위해야 할 일상생활이 버거워서다. 특히 질병과 안전 위협으로부터의 생존 전략을 잘 세워나가야 했으므로 처음엔 하루하루 긴장 속에 보냈다. 모기에 물리지 마라,생수로만 양치하라, 병원갈 일 만들지 마라, 해지면 외출하지 마라 등 주의사항을 실천하느라.

간신히 셋집 얻고보니 이건 뭐야?

개척이란 말이 실감났다. 개척과 극복의 대상은 첫째가 언어소통이었고, 다음은 먹고사는 문제, 즉 ‘생존형 자취’였다. 그리고 수업환경, 주거환경, 도시환경, 문화환경 같은 것들이 나의 도전의식을 예의 자극해 왔다. 고독은 사치였다. 오기나 호기심으로 의연함에 시동걸었으나 때로 좌절과 짜증에 꺼지는 일도 있었다. 그럴수록 맛보는 보람과 성취감 또한 묘했다.

임지 도착 후 교내 실습호텔에 머물면서 우선 셋집을 찾아 나섰다. 단독거주가 원칙이이어서 얹혀 사는 건 불가다. 내가 파견된 학교의 관계자―여기서는 ‘코워커’라 부른다―도움으로 이 동네, 저 동네를 둘러봤다. 들은 바가 있어 ▶이슬람 사원과 거리가 멀 것▶깨끗할 것▶학교와 가까울 것 등 세 가지 조건을 주문했다.
 

▲ 학교 로비에서 교직원들과 함께(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교장).

사원과의 거리는 기도를 알리는 스피커방송(아잔·azan) 소음을 피하라는 조언을 귀따갑게 들었기 때문인데, 정작 집 보러 다니다보니 그 거리를 재 볼 계제가 아니었다. 낡지 않으면 불결하거나, 방범에 문제 있거나, 주거비 한도를 초과하는 등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임기 마치고 몇 달 전 귀국한 단원이 살던 집에도 가 보았다. 빈집으로 방치돼서인지 방 구석에 곰팡이가 보이고 뭔가 허술해 보였다.

나중에야 코워커가 “좀 비싸지만 친구가 새로 지은 집에 가 보자”며 안내를 했다. 이슬람 사원도 멀리 있다고 했다. 과연 본 집 중 가장 깨끗했다. 주인은 새로 들여 놓은 가구 자랑에다 “냉장고, 세탁기,에어콘까지 모두 삼성 제품”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월세가 360달러였다.

코이카의 주거비 지원한도(월 290달러) 초과다. 코워커가 중간에서 흥정해 보겠다고 해서 250달러를 제시해 놓고 반응을 살폈지만 속으로 미련을 지워 갔다. 아무리 깎아 준대도 지원 상한에 가까운 금액은 과분하단 생각에서다.

“비싸서 코이카 허가가 필요한 데다 초과액은 개인 부담”이라고 엄살부리며 퉁겨 봤다. 그런데 코워커가 “기다려 보라”며 어떻게든 계약을 성사시키려고 왠지 안달이 났다. 결국 이틀 ‘밀당’ 끝에 270달러에 서명했다. 고마움과 부담감이 교차했다.

파견 사흘 만에 집계약을 끝낸 건 참 다행이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을 두 가지 겪으며 “그러면 그렇지”를 뇌어야 했다. 즉시 입주를 원했던 나의 바람은 1년치 월세 완납을 요구하는 집주인의 고집 앞에 무산됐고, 아잔이 공해 수준이었던 것이다. “계약금 낼 테니…” 해도 막무가내였다.

코이카로부터 송금이 이뤄질 때까지 7일을 불편하기 짝이 없는 호텔에서 묵으며 기다려야 했다. 또 그리도 강조했던 사원과의 이격거리가 알고 보니 70m밖에 안 됐다. 작아서 앞집에 가려 있는 걸 못 본 것이다. 낮엔 몰라도 새벽 5시 전후는 잠결에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더구나 거기 말고도 사원이 두 군데나 더 있다. 고성능 스피커로 틀어대는 아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코워커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기대하며 나중에 “사원이 멀다더니…”라고 따졌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자우, 자우(멀리 있다)”를 거푸 외치며 외려 예민한 사람 취급했다.
 

▲ 학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주택가에 위치한 셋집. 뒷모습의 두 여성은 학교 교사(코워커).

문제의식과 개선의지 약한 현지인들

과연 현지인들은 뒷감당 생각 않고 무조건 “그럼 그럼”을 외친다는 선배들의 귀띔대로였다. 길도 모르면서 안다고 큰소리치는 택시 기사, 주문받고 나서 나중에 “떨어졌는데요”를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는 종업원 등. 그러니 맘에 둘 일은 아니었다. 이 두 가지 당황스런 일은 이곳 사람들 일처리 방식을 엿보게 했다. 신뢰 부족의 불완전한 ‘계약사회’의 모습과 얼렁뚱땅 눙치는 버릇으로 요약될 것 같다. 불안한 계약 사회에서는 계약 당사자 혹은 고객의 만족이 보장되기 어렵게 마련이다.

호텔에서 나와 하루라도 빨리 셋집에 입주하려 했던 건, 자카르타에서 사온 반찬으로 ‘집밥’을 해먹고 싶어서기도 하지만 호텔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교내 호텔이라 해서, ‘딜럭스’ 방이라 해도 기대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무엇보다 실내가 너무 어두웠다. 냄새 나는 베개와 담요, 얼룩진 시트는 잘 때마다 인내력 테스트를 했다. 갈아 주지 않는다. 장판 바닥에 흙먼지가 더께를 이뤘지만 실내화가 없다.

물과 휴지도 내가 사야 했다. 욕실엔 매일 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숨바꼭질했다. 모기는 겁 났고, 수돗물은 짜증스러웠다. 늘 쫄쫄거리는 데다 누렇다 보니 씻는 게 고역이었다. 에어컨이 있어도 잦은 정전에다 소음이 심해 맘 놓고 틀지도 못했다. ‘호텔설비과’ 실습용이라는 게 무색했다. 학교 수입원이기도 한 모양인데,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수업을 맡기도 전에 학교 운영에 대한 선입견이 이렇게 생기고 말았다.

어쩌면 이게 다 미적응의 낯가림이 아닐까. 각오를 했음에도 호텔 숙박과 셋집 구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이 정겨움으로 바뀌기까지는 제법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하나의 부정적 시각을 이해와 적응으로 교정하고 나면, 또 다른 일이 원위치로 되돌려 버리곤 했다. 거기엔 학교운영, 교실분위기, 질서의식, 환경의식, 위생관념, 상거래 서비스, 행정인프라, 도시기반시설 등이 다 포함된다. 하기야 이 나라만의 비자발급 늑장이 이미 부정적 인식을 깔아 놓았음에랴.

그래도 호텔 직원이나 교사들은 무척 친절했다. 순박함이나 다정함이 넘쳤다. 다만 문제의식과 개선 의지가 약해 보인다. 이런 가운데 늘 경계하고자 했던 말이 있으니, 선민의식이다.

교육받을 때 한국과 비교하는 발언을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한국의 고유 문화나 선진 인프라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자칫 자랑으로 비칠 수 있어서다. 자제한다고 하는데도, 나도 모르게 “한국에서는…” 식으로 대화를 풀어갈 때가 종종 있다. 화제에 따라서 불가피할 수도 있겠는데 문득 선민의식의 발로는 아닌지 짚어볼 때가 잦았다. 국민적 자존심 관련 사항일 수 있으니 말이다.

어떤 때는 말을 해놓고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는 개구리가 생각나서 내심 부끄러웠던 적도 있다. 지금의 한국도 구석구석 들여다 보면 부끄러운 자화상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민과 선진은 고사하고 도처에 천민(賤民)의식과 후진적 행태가 판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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