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이기기 위해 펼쳐 든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김상수 충북재활원장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윤동주 지음. 도서출판 소와다리 펴냄.

한 달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100만이 넘어서더니, 200만을 넘나드는 촛불이 빛과 함성의 연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친일사관에 의해 규정하는 우리 민족은 쉬 달궈지고 쉬 식는 민족성이라 합니다. 진화하는 촛불을 보며 그런 지적이 의도적이며 틀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 주말 추위와 피곤을 무릅쓴 채 즐겨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의 결기는 지식인과 특정세력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저항운동을 민주공화국시민들의 진화한 축제로 바꿔놓았습니다.

촛불집회는 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디어나 정치권이 유포하는 패러다임의 속내를 알아 쉽게 속지도 않습니다.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초·중·고·대학생은 물론 남녀를 불문하고, 보수로 규정된 노년세대까지 망라합니다. 깃발에 적힌 단체 이름은 분노 앞에 웃음을 선사하는 해학입니다.

해방이후부터 이무기처럼 공고히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세력의 행태는 이 엄중함과는 별개로 펼쳐집니다. 청와대발 3차 담화문을 접하고 성서의 말씀을 펼치지 않고는 분노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윤동주 시인의 아픔이 전해졌습니다.

1917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 현재의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시인 윤동주는 태어났습니다. 명동소학교, 명동중학교로 발전한 ‘규암재’는 외삼촌인 김약연 선생이 설립하여 대한민국 근현대 역사에서 민족정신을 이끈 산실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윤동주 시인과 같은 감옥에서 옥사한 고종사촌 송몽규, 외사촌 김정우, 문익환 목사님 등이 함께 공부했던 급우들입니다.

서시(序詩)부터 종시(終始)까지 100여 편의 詩들은 식민지배자의 잔혹한 광기가 전쟁으로 이어지고, 땅을 초토화시키고, 민족을 착취하고, 문화를 말살해가던 와중에도 잃지 않았던 심연의 노래들입니다. 무엇으로도 불가항력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깊은 절망 앞에서 한 점 바람에게 말을 건네는 처절한 아름다움 입니다.

한 줄 詩가 가진 커다란 힘

일제에 의해 정치범으로 구속된 청년의 꿈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순간도 달과 구름과 바람과 하늘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아프다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이 땅의 살아있는 것들에 시인의 눈과 가슴과 사랑이 닿아있습니다. 일제의 감시를 넘어 지금 오늘로 실려 온 시인의 호흡은 거대한 촛불을 지켜봅니다.

나라 잃은 27살 청년이 감옥에서 죽어갈 때도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며, 거짓과 불의를 일삼았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독립군이 피를 토하며 옥사할 때, 일본군 장교가 되겠다며 혈서를 쓴 사람에게 이 詩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습니다.

한 줄 詩의 아름다움과 연약함이 가진 강건한 가치를 그들의 천박성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골방에서 詩를 쓰느니, 백옥주사를 맞고 얼굴에 인공광채를 드리우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라 여긴다는 것을. 어제의 말과 오늘의 말이 다르고,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격조차 갖추지 못해도 돈과 권력을 가진 것이 더 낫다고 여긴다는 것을. 불법적 권능을 공권력의 이름으로 감춘 채 행사하는 것을 애국으로 포장하는 최면상태라는 것을.

태어날 마땅한 곳이 없어 말의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연약함을 묵상합니다. 세상을 이긴 것은 언제나 힘과 권세가 아니라 연약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 수 있는 힘은 인간 내면의 가장 내밀한 양심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 윤동주의 詩, 이 얇고 슬픈 책으로 강건함을 새롭게 해봅니다. 우리 모두가 강함보다는 약함을 사랑하고, 약함이 결국 세상을 이긴다는 진리의 촛불을 밝히기 위해 詩 한 권을 함께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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