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수 온달·삿갓 시인 김병연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36)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당신은 영춘에 가본 적이 있나요? 참 아름답고 아늑한 고을입니다. 한자로 ‘永春’이라고 쓰니 ‘늘봄’이라고 읽어야 할까요? 봄에서 시간이 멈춘 듯 아련한 느낌에 먹고사는 걱정이 없다면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팍팍한 산골인데, 필경은 물정 모르는 과객의 눈에 비친 정경일 것입니다.

▲ 영춘면 의풍리와 김삿갓면 와석리 경계에 조성된 김병연 유적공원. 많은 시비와 집터, 묘소를 볼 수 있다.

온달이 쌓았다는 설화 전하는 온달산성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도 적성산성과 같이 삼국시대의 유적인데, 그 무렵 축조된 산성으로는 드물게 원형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 온달 장군이 쌓았다는 설화가 전하거니와 주변 마을의 지명이나 무수한 온달 관련 유적들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문 구조, 기단부 보축, 수구의 형태 등이 신라 산성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신라 쪽에서 쌓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 쌓았건 뺏고 빼앗기는 와중에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요새로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라는 이야기로 잘 알려진 온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이 유일합니다. 바보 온달이라고 불리던 온달이 평강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인생의 전환을 맞아 뛰어난 장수가 되었다는 것이죠. 역사학자들은 온달이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하는 반면에 문학자들은 설화 속의 인물로 전제하고 접근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얼른 듣기에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결혼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벼락같이 떨쳐 일어난 신흥무인에게 공주를 시집보내야 할 만큼 고구려의 형편이 안 좋았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유적공원 입구에 서 있는 시비. 우람한 시비가 많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삼국사기》 <온달전>은, 영양왕 1년(590)에 온달이 “신라가 우리 한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나 그곳 백성들은 통한하여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하여 왕이 허락하니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다짐하고 출정하였으나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신라군과 접전을 벌이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온달은 이 산성을 빼앗고자 공략하던 중에 전사한 게 아닌지 추측해볼 뿐인데, 어쨌든 이 싸움에서 퇴각한 이후 고구려는 을아단 땅을 다시 밟지 못했고 국운 또한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적성산성이나 온달산성이나 모두 강가에 배치된 전선(戰線)이었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을 지켜본 강이니 고구려·신라 사람들의 싸움과 죽음도 보았을 테죠. 그러나 강은 예나 지금이나 입이 무거워서 도대체 말이 없고, 말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만 천년을 두고 흘러 다닙니다.

조상을 욕되게 했다는 죄책감에 삿갓 쓴 시인

《정감록》에 ‘兩白之間 求於人 三豊之間 求於種’이라 하여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소개하는 글이 있는데, 여기서 ‘양백’은 태백과 소백을 이르는 말이요 ‘삼풍’은 1914년 이전에 의풍을 부르던 이름입니다. 의풍리의 동쪽으로는 영주 부석면으로 넘어가는 마구령, 서쪽은 단양 영춘면 소재지로 나가는 베틀재, 남쪽은 영주 단산면으로 이어지는 고치령, 북쪽으로는 노루목을 거쳐 영월로 나가는 길이니 어느 쪽도 만만한 길이 없습니다. 의풍에 사는 이들은 그러니까 《정감록》의 비결을 믿고 들어와 세상의 문을 닫고 살아온 사람들인 셈이죠. 김병연(1807~1863)의 어머니 또한 폐족자(廢族者)라는 멸시를 피해 이 첩경의 땅으로 숨어들었던 걸까요?

영춘면에 속하는 의풍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595번 지방도는 영춘을 거쳐 영월로 통하는 길인데, 영춘면 소재지에서 길을 바꾸어 935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베틀재를 넘어 의풍리로 들어갑니다. 사방이 첩첩산중이니 ‘들어간다’는 말 밖에는 다른 말이 마땅치 않습니다. 의풍리에서 영월 쪽으로 3㎞쯤 떨어진 노루목에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의 유적지가 있습니다.

이곳은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단양과 영월이 나뉘는 접경 지역이죠. 즉, 집터와 시비는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요 묘소는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입니다. 영월 서강의 한반도 지형이 유명세를 타자 원래 서면이던 것을 한반도면으로 바꾼 것처럼 하동면을 김삿갓면으로 개명한 자치단체의 기염에 속절없이 한번 웃습니다.

▲ 김병연 묘소. 전남 화순에서 생을 마친 그의 유해를 둘째 익균이 수습하여 이곳에 안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경래의 난(1811)이 일어난 해는 김병연이 네 살 때였습니다. 그때 선천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이 반란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폐족이 되어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했다가 어머니를 따라 이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김병연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향시(鄕試)에서 김익순을 꾸짖는 글을 써서 장원을 차지했죠. 뒤늦게 모든 곡절을 알고 조상을 욕되게 했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 채 방랑의 길을 떠나니 그의 나이 갓 스무 살 무렵이었습니다.

“스무나무 아래 설운 나그네에게/망할 놈의 마을에선 쉰 밥을 주는구나/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구나(二十樹下三十客/四十村中五十食/人間豈有七十事/不如歸家三十食)”― 묘소로 올라가는 길엔 아예 시비 밭이라고 해야 할 만큼 많은 시비가 서 있는데, 그 중에도 입구에 조그맣고 초라하게 서 있는 시비에 마음이 끌립니다. ‘三十’을 ‘설운’으로 쓴다거나 ‘七十’을 ‘이런(일흔)’으로 쓰는 자유분방한 필법은 죽장망혜(竹杖芒鞋)에 의지해 일생을 길에서 보낸, 인간사의 형식과 속박을 벗어던진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집니다.

어찌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전국을 유람하다가 4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길을 떠난 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해학과 풍자가 뒤섞인 파격의 시를 쓰며 세상을 떠돌며 조롱하다가 57세 때 전라도 화순에서 한스런 삶을 마치고 말았죠. 기구한 운명으로 한 세상을 견디고 결국 유해가 되어서야 돌아와 묻힌 천재시인의 무덤 앞에 서 있노라면 단단한 ‘단양 육쪽 마늘’을 생으로 씹은 듯 알싸한 맛이 입 안 가득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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