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호에 잠긴 무릉리 떠나 사창시장 정착한 장병순 씨
3평짜리 영보가게로 시작, 35년만에 30평 슈퍼로 키워

토박이 열전(19)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실향민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말한다. 어찌된 이유로든 고향을 떠났으나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돌아갈 길이 막힌 사람들이다.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는 특히나 실향민들이 많다. 휴전선 이북에 버젓이 고향이 있어도 그들은 돌아갈 기약이 없다. 기약은 없다지만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는 살아있다.

희망의 불씨마저 꺼져버린 실향민들은 다른 곳에 있다. 개발행위 등으로 인해 아예 고향이 사라져버린 경우다. 불도저가 밀어붙이고 굴삭기 삽날이 파헤친 고향은 이름마저 낯선 타향으로 변해버리기 일쑤다. 그렇다 해도 그들에게는 걸어볼 땅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은 실향민이 아니다.

진짜 실향민들은 다목적댐이 개발되면서 고향이 물에 잠겨버린 수몰민들이다. 공교롭게도 충북에는 저수량을 기준으로 국내 2위인 충주댐과 3위인 대청댐이 있다. 그 중 충주댐은 만수위 때의 수면면적이 97㎢로 우리나라 최대의 담수호다. 1980년에 착공하여 1986년에 완공되었는데, 댐 건설로 66.48㎢가 수몰되었으며 수몰이주민은 4만9600여명에 이른다. 이로 인해 단양에 신도시가 건설됐고, 그리로 가지 않은 이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청주시 흥덕구 사직대로164번길 36 일대에 있는 사창시장에는 충주닭집, 충주야채, 충주란제리 등 유난히 충주라는 지명을 단 간판들이 많다. 내력을 들어보니 충주댐 수몰민 가운데 일부가 사창동에 정착해 시장형성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깃발을 꽂은 가게가 영보슈퍼, 1981년 개점 당시의 영보가게다.

영보슈퍼는 현재 사창시장의 요소에 자리한 어엿한 슈퍼마켓이다. 좁은 시장 안에 30평이나 되는 규모도 압도적이지만 주인장 서정애 씨의 입담이 손님들을 휘어잡는다. 치약 여섯 개를 산 손님에게 우수리 300원 정도는 기분 좋게 깎아준다.

“나는 막내며느리에요. 장사도 20년 밖에 안했고, 우리 시어머니가 오래했죠. 어머니 때부터 따지면 35년이나 됐으니까요. 시댁이 충주댐 수몰민이에요. 충주시 살미면 무릉리…. 집이 물에 잠기고 아버님, 어머님, 형님부부가 수레에 벼를 싣고 울면서 나왔대요. 그까짓 것 방아 찧어서 팔고 나와도 됐는데, 마지막 농사 진 거라고 그랬나 봐요. 남편은 살미면 살 때 군대 갔다가 지금 주소로 제대했다고 그러더라고요.”

물에 잠긴 고향이 무릉리라니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떠오른다. 물 위에 떠오는 복사꽃잎을 따라갔더니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가 나오더라는 얘기 말이다. 이제는 이들의 고향길이 물에 잠겼으나 물속 무릉리가 그런 용궁세상이 아닐까 싶다.

청주로 나온 것이 1981년 무렵이다. 무릉리 사람들, 옆 동네 사람들 중에 같이 터를 잡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시엔 사창시장 자리가 온통 논바닥이라 땅값이 저렴했던 까닭이다. 사창시장 안에 있는 수몰민 가게 예닐곱 집을 비롯해, 수몰민 서른 집이 함께 계(契)를 하기도 했단다.

현재 영보슈퍼 2층에는 살림집이 있는데 고령에 고관절 통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장병순(1927년생) 씨가 그예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슈퍼로 내려왔다.

“그때 이 주변에 집이고 가게고 한 채도 없었어. 브로꾸(블록, 벽돌) 찍는 데만 있었고, 장화 없이는 다닐 수도 없을 만큼 질퍽거렸던 곳이야. 수몰 보상비용으로 받은 1900만원으로 논 가운데에 있는 손바닥만한 가게를 얻었는데, 그게 영보가게야. 이 가게가 논 가운데 달랑 가마 떠다 놓은 것같이 있었지. 파는 거라고 뭐가 있었나? 국수하고 빵, 남새 같은 것들…. 가게냐고 세 평이나 됐을런가. 비만 오면 온 동네 물이 다 이리로 흘러들었어.”

아내에게 가게를 맡기고 리어카로 참외장사를 하던 남편은 청주로 나온 지 몇 해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큰아들마저도 병으로 앞세웠다. 강원도 강릉에서 멀쩡히 직장생활을 하던 막내 내외를 슈퍼로 불러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시어머니는 그게 미안하지만 막내며느리는 영보가게가 영보슈퍼로 번창한 35년 세월동안 3대가 무탈하게 살아왔음에 감사할 뿐이다.

“지금이야 시장도 여기저기 생기고 대형마트가 손님을 빼앗아갔지만 옛날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장사가 아니었지. 배달꾼까지 두고 장사를 했으니까. 술집 같은 데 주류도 납품해야 했고, 재개발이 되기 전까지는 손님들이 득실득실했어. 봉명동, 가경동에서도 여기로 장보러 왔으니까. 처음에 세 평이던 가게가 주변 땅을 사면서 30평이 됐고, 2층에 살림집도 올리고 네댓 번은 공사를 했지. 그동안 손자, 손녀 다 가르쳤고. 큰 손녀는 박사까지 공부했어.”

지금도 예전 같다면 오히려 장사를 할 수 있을까 싶다. 처음에는 새벽 5시에 문을 열어 밤 12시 반까지 팔았단다. 그래 봤자 오전 7시에 문을 열어 밤 12시까지 장사를 하니 바지런함이 몸에 밴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1주공, 2주공이 다 철거되고 재개발이 이뤄지기까지 4,5년은 그야말로 버텨내야했던 시간이었다. 이제와 아파트 인구가 엄청나게 늘었다지만 옛날의 영화가 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이제 고부가 육감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집에 살며 함께 일하는 동안 고부갈등은 없었을까? 뜬금없이 그게 궁금해졌다.

“우리 시어머니가 면에서도 유명한 호랭이(호랑이)였으니까, 나는 시집살이 말도 못하게 했지. 그래서 며느리들한테는 시집살이 시키지 말자고, 시집살이는 하나도 시킨 게 없어.”

“우리 어머니가 시집살이는 안 시켰어요. 기억력이 너무나도 좋으셔서 그렇지. 지금도 젊은 사람보다 더 잘 기억해요. 당최 잊어버리시는 게 없으시니까….”

고부가 동시에 답을 했다. 그런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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