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노 칼럼 ‘吐’/ 충주·음성담당 부장

▲ 윤호노 부장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옛 조선식산은행 건물 복원을 두고 지역이 시끄럽다. 충주시민들이라면 성내동 새마을금고에서 북문방향 네거리 우측면에 이르면 특이한 건축양식의 이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일본은 1904년 9월 내정개선을 구실로 제1차한일협약을 체결하고 고문정치를 시행했다. 이때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일본인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은 1905년 6월 1일부터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면서 종래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해 일본 제일은행권의 새 화폐로 교환해 사용하게 했다. 백동화를 갑을병종으로 나눠 갑종은 본래 값인 2전 5리로, 을종은 1전으로 교환해주고, 병종은 교환 없이 폐기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백동화 가치는 크게 폭락했으며, 조선 상인들은 극심한 자금부족과 함께 점차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 상인들은 자구책의 일환으로 1905년 7월 상업회의소를 결성하면서 대응했지만 일본의 경제침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일본의 중소농금융기관인 ‘농공은행’과 유사한 식민지 개발금융 성격의 농공은행 조례를 공포하고 농공은행 설립절차를 제시하고 설립을 추진했다.

농공은행은 내륙지방의 관찰부 소재지에 본점을 두는 지방은행으로 1906년부터 설립됐다. 6월 한성, 평양, 대구, 전주에서, 7월 진주, 8월에는 충주, 해주, 경성에서, 다음해인 1907년에는 공주에서, 같은 해 8월 함흥에서 설립되는 등 전국적인 단위은행으로 들어섰다. 자본금 10만 원으로 시작한 충주농공은행은 식민지 금융침탈기구로 설립됐고, 이후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조선식산은행은 일제의 식민지 경영에 있어 특수한 사명을 지니고 특별법에 의해 설립됐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감독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조선총독부의 경제정책의 자금조달 역할을 수행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식민통치목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국책금융기관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 건물 복원 찬성론자들은 옛 조선식산은행 건물이 건축·역사학적으로 등록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대건축으로 실증적 증거인 식산은행은 역사적 자산이며, 일제 강점기 역사를 지울 수 없듯이 도시에 새겨진 흔적도 억지로 지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놓고 1995년 국내 여론이 극렬하게 양분됐다.

총독부 건물 철거에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비판도 일었다. 심지어 일부 학자는 조선총독부 청사야말로 일제가 이 땅에 남긴 건축물 가운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훌륭한 건축물이라며 치켜세웠다.

유적을 보존 또는 복원할 것인지와 허물어 버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시대 사회의 정신을 표출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지어졌다고 해서 다 부수자는 의미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조선은행 건물은 지금도 한국은행 본점 건물로, 경성역사 건물은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의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충주의 경우 그곳을 복원해 근대문화전시관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거기에 투입되는 예산도 수십억 원이다. 더욱이 시는 충주읍성 복원을 꾀하고 있다. 충주읍성 내 일제 잔재물인 건물을 복원하는 것은 민족정기 확립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충주읍성 복원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조선식산은행 철거는 건축사적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의미가 있다. 침략국이 남긴 ‘역사적 흉터’이기에 더욱 그렇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