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법원이 촛불 시위 때마다 주최측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이게 나라냐!”는 국민들의 상실감은 더욱 커져만 갔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겠지만 촛불 정국에서 그나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된 것은 법원의 계속된 가처분 인용 때문이었다.

청와대와의 거리가 900m(11월 12일 3차)-400m(11월 19일 4차)-200m(11월 26일 5차)-100m(12월 3일 6차) 순으로 점차 좁혀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린, 아니 거의 포기 상황으로 치닫던 국가라는 기제에 대한 믿음을 다시 간신히 부여잡게 된 것이다. 집시법보다 헌법적 가치가 우선이라는 판결이 안기는 그 살떨리는(?) 울림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세 번에 걸친 담화로 자꾸 음습해져만 가던 마음을 법원판결이 일거에 치유해 준 것이다.

그동안 국민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단연 극도의 배신감과 참담함이다. 박근혜와 최순실 뿐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어떻게 저렇듯 저질스럽게 돌아갈 수 있느냐는, 바로 정신적 공황과 좌절에서 치받쳐오르는 분노의 모멸감인 것이다. 멀게는 해방 이후의 혼돈으로부터 가깝게는 6월 항쟁(1987)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그 엄청난 희생으로 쟁취한 민주국가 대한민국이 장삼이사(張三李四)도 아닌 아예 천박한 것들에게 농락당했다는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대책없이 고통스러웠다.

역사적 격동기 때마다의 법원 운신은 이른바 사법파동으로 상징된다. 현재 사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법파동은 1971년과 1988년 두 차례다. 1차 사법파동은 검찰이 당시 보안법에 대한 무죄판결이 많은 특정 재판부를 상대로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비롯됐다. 하지만 법원에 의해 영장은 기각됐고 정권의 부당한 탄압이라고 맞선 판사들은 전체 인원의 4분의 1이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상황을 반전시킨다. 이 사태는 결국 해당 검찰의 문책으로 끝난다.

2차 사법파동은 1988년 노태우 정권에서 터져 나왔다. 정부가 대법원장 등 법원 수뇌부를 재임용하려는 순간, 판사 330여명이 사법부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정면 대립한다. 5공 독재정권에 몸담았던 수뇌부의 재임용반대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노태우는 대법원장을 교체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한다.

시각에 따라선 사법파동을 5차, 6차까지 인정하기도 하는데 한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다면 대부분 소장판사들이 주축이 돼 사법권 독립을 외치며 항명했고 이것은 곧 사회변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꼭 물리적 성과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국민적 정서와 자각에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번 광화문 촛불시위에 대해 회차가 거듭될 수록 헌법적 가치를 내세워 청와대와 더 가까운 거리로 주최측의 손을 들어준 법원판결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다른 건 몰라도 ‘행정은 대통령의 몸종이 되고 친박으로 상징되는 입법(국회)은 대통령의 호위무사가 되었다’는 박근혜 정권의 아수라장에 기생해 과거 독재권력의 망령인 정치공작과 음모, 조작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그래도 사법의 독립과 권위를 곧추세워 3권분립을 회복하는 역사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아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재판을 맡은 서울행정법원 김정숙 부장판사(49)는 결정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집회를 조건 없이 허용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12월에도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규탄 범국민대책위’가 서울지방청장을 상대로 낸 옥외집회 금지통고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공감(共感)은 인간 삶의 가장 큰 행복이다.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를 알아차리는 순간 이건 가슴 뭉클한 감동이 되고 위로가 된다.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격려가 되고 약속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작된 통혁당 사건으로 20여년 감옥생활을 한 신영복 교수가 숱한 수형자들과 만나고 대화한 것으로부터 깨우친 삶의 교훈이다.

박근혜 정권 들어 국민들은 단 한번도 대통령과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니 ‘대통령도 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가슴 뭉클한 감동과 위로 역시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 왔다. 대통령은 그가 걸어온 인생의 결론대로 최순실가와 친박들하고만 교감하며 국정을 거덜냈다. 대통령의 주위를 맴돌며 끝까지 국민들을 현혹한 간신배들 또한 그들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대로 살아가고 있다. 여지없이 그들의 조상은 대부분 친일분자다.

이럴 때 이 나라 법원은 ‘국민에게 믿음과 안도감을 줘야 할 헌법적 책무’를 강조하며 국민들과 공감했다. 그 결과는 200만명의 촛불시위에도 단 한건의 불상사와 단 한명의 연행자도 없는 세계 초유의 시민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 아니 다가오는 주말에 그 혁명의 완성은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그 기쁨과 환희에 내쳐 달려나가 통곡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게 나라다!”를 외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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