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무의 역사의 오솔길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이루어졌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용암동 일대는 청주의 외곽으로 과수원이나 소채 농사를 짓던 농촌이었다. 보은으로 향하는 큰길가 언덕배기에는 청주의 대표적 성씨인 청주 한씨의 집성촌이다. 전국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씨(韓氏)는 모두 청주 한씨 단일 본이다.

대머리 한씨라고도 불리는 청주 한씨는 고려의 개국공신 한란(韓蘭)을 시조로 삼고 있다.
현재 용암동 신도시 입구에 있는 무농정(務農亭:지방기념물 제 85호) 과 방정(方井:지방기념물 제 84호)은 한란의 교육열과 후삼국의 풍운을 담고 있는 곳이다.

무농정은 한란이 농사를 권장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전국의 수많은 정자가 인문분야 글공부를 위한 후학 양성에 치중한데 비해 유독 무농정은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던 것이니 학파로 따지면 실학(實學)에 가깝고 요즘으로 치면 농업기술원에 해당하는 셈이다.

하루는 한란이 꿈을 꾸는데 청룡과 황룡이 승천을 다투는 것이었다. 한 마리의 용은 죽고 한 마리는 승천하였는데 그 후로 대머리 일대의 평야지대에서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뜰을 일컬어 용개(龍開)뜰이라 부른다.

농사짓는데 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여기의 방정은 주민의 식수원이 될 뿐만 아니라 용개뜰까지 적셔주었다.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어 한란이 기우제를 지내다 쓰러졌는데 어느 장수가 나타나 창 끝으로 땅을 찌르니 물이 큰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마을사람들이 힘을 합쳐 네모진 형태로 샘을 파니 그 후론 아무리 가물어도 샘이 마르지 않았으며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방서동에서 선도산 자락을 끼고 상당산성에 이르는 길은 신작로가 나기 이전의 국도다.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의하면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고 견훤은 작강(鵲江:까치내)변에 토성을 쌓아 세금을 거둬들이며 서로 대치하였다’고 한다.

한때 견훤은 상당산성을 빼앗아 거주하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이를 치러 청주에 집결하였다. 왕건의 군사 10만명이 집결하여 공격 전, 휴식을 취한 곳이 바로 무농정과 방정이다. 왕건의 군사와 말(馬)은 방정에서 충분히 물을 먹고 휴식을 취한 후 선도산 자락을 타고 상당산성에 이르렀다

왕건은 복지겸과 작전을 논의했다. 왕건이 “상당은 험하여 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갚하고 묻자 복지겸은 “험한 지형을 믿는 자는 패한다고 하였으니 저 병사들은 지세가 험한 서북을 방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당을 치는 데에는 의병(疑兵)작전이 좋을 듯 합니다”

왕건은 복지겸의 말대로 남문(控南門)에서 창 검 기치를 흔들고 실제로는 북쪽 성벽을 쳐서 견훤의 군대를 함락시켰다. 이 작전에 합류한 한란은 개국공신인 벽상공 반열에 올랐다.

현재의 방정은 둥근 돌담을 치고 유리 덮개를 해 씌웠으나 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인근에 아파트, 수영장 등이 들어선 후 우물이 말라 버리고 다만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

최근에 청주시가 아파트 공사 승인 허가를 내 주면서 문화재보존 영향평가를 검토하지 않은 것은 큰 실수다.

문화재보호법에는 토목공사를 하기 전 반드시 영향평가를 하도록 돼 있다. 도지정문화재의 경우 300m이내에 해당한다. 방정은 공사현장에서 불과 40m 떨어져 있다. 허가를 해주고 뒤늦게 부랴부랴 공사중지 통보를 하는 식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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