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집 ‘살푸슴’ 발간, 고인의 작품과 추모글 담겨

‘청주문화의 대부이며 시민사회운동의 선구자’ 였던 선생에 얽힌 이야기 ‘만발’

동범 최병준 선생의 유고집 ‘살푸슴’이 세상에 나왔다. ‘동범 최병준선생 유고집 발간위원회(위원장 윤석위)’를 비롯한 지역인사들은 지난 5일 서원대 미래창조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갖고 동범을 추모했다. ‘살푸슴’이란 김정기 서원대 교수가 선생의 미소를 보고 ‘새 색시인양 살푸시 웃는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 이 유고집에는 선생이 생전에 써온 시와 기행문, 수필, 칼럼 등과 동범을 다룬 신문기사 및 추모글, 사진 등이 들어있다.

▲ 출판기념회 문화 및 시민단체 탄생시킨 주역 선생은 지난 2001년 10월 11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1인분의 행복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온 그의 족적 때문이다. 그는 청주문화의 대부, 지역 시민사회운동의 선구자, 빛과 소금처럼 살아온 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밝고 건강하게 만든 주역이었다. 충북예총,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청주경실련, 충북총선시민연대를 창립하는 데 결정적인 일을 한 선생은 칠십 평생 문화와 시민사회단체에서 봉사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늘 가난했다. 도종환 시인은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시민운동의 대부’라는 추모글에서 선생의 삶에 대해 이렇게 썼다.“선생님은 검소하고 소박한 삶의 본보기셨다. 시민회가 만들어지고 경실련이 만들어지고 문화운동에서 청주지역 시민운동의 대표이면서 대부로 활동하시는 분이 늘 동전 몇 개를 만지작거리며 시내버스를 기다리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청주지역사회는 오랜 세월 선생님께 진 빚이 많다. 평생 돈 한 푼 안받고 일구어내시고 이룩해 오신 일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돈보다 훨씬 큰 것들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청주지역사회는 선생님을 불러다 썼다. 그러고는 귀중한 줄도 몰랐다.”그리고 남기헌 충청대 교수는 충북참여연대에서의 인연을 회고하며 “충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시민운동의 중심에는 항상 최병준 회장께서 계셨다. 그 중에서도 직지찾기운동, 자치단체장 평가운동, 지방의회의원 평가운동이 그러했고 공명선거운동, 낙천낙선운동, 정치개혁운동, 환경보전운동 등에 쏟으신 열정은 정의와 평화, 봉사를 갈구하는 조직과 단체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 주셨다. 남을 배려하고 옳고 그름에 냉철하고 자기 몸을 낮추면서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 분의 생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사신 분이라 말하고 싶다”고 했다. 또 선생의 부인인 김영애씨는 추모글에서 자신을 버리고 평생 남을 위해 살다간 사람이라며 “71년 외국문화 시찰 방문이 있었는데 8대 국회의원 선거시 공명선거 캠페인 관계로 출국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그 때부터 사사건건 제지당하는 절망적인 생활이 시작됐다. 심적 고통으로 괴로워 하던 중 급기야 심장 부정맥이라는 지병을 얻게 되었고 27년간 지독한 병마에 시달렸다. 그는 없이 살면서도 자신보다 더 없는 사람을 걱정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썼다. 실제 동범은 71년 청주지역에서 공명선거 캠페인을 가장 먼저 벌인 인물이었다. 관권, 금권, 타락선거를 없애기 위해 당시 법조계 언론계 문화계 인사 10여명이 깨끗한 선거를 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유인물을 돌렸던 것. 그러자 당국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선생의 활동을 방해했고 그는 심장마비로 죽음 문턱까지 가는 고통을 겪었다. 이후 인공 심장박동기를 달고 산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선생을 아끼는 지인들 이었다. 이들은 십시일반 치료비를 모금하고 그가 다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 유고집
억울함 안고 세상 떠난 이


그러던 동범은 지난 2001년 다시 엄청난 고통의 늪에 빠지고 만다. 김영세 전 교육감의 비리의혹과 관련해 주변 인물을 조사하던 검찰은 건설업자 이모씨가 89년부터 매달 100만원씩 선생에게 송금한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이씨는 동범에게 이 돈을 불우노인돕기에 써달라며 아무 조건없이 기탁했던 것이고, 선생은 일부를 불우이웃돕기에 쓰고 일부는 통장에 보관해 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교육감과 이씨의 관계를 추적하던 검찰은 김 전 교육감의 처남인 동범에게 로비자금이 흘러들어간 게 아니냐는 의혹을 가졌던 것으로 당시 알려졌다.

그래서 횡령혐의를 받고 불구속 기소되어 같은 해 3월부터 검찰에 불려가 재판을 받은 그는 불명예와 치욕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2001년 2월 충북참여연대 대표회장직을 사퇴하며 선생은 “비록 본의는 아니었지만 저로 인해 도덕적 순수성을 생명으로 하는 시민운동단체에 시민들이 의문을 품게 하고, 결과적으로 시민운동의 명예를 훼손한 점은 그 어떤 말로도 치유되기 어려운 아픔이자 고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단체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검찰에서 발표한 7000만원 횡령혐의를 시인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힙니다”며 “저는 불우노인을 위한 후원금을 기탁한 이사장의 순수한 뜻을 존중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고, 이 돈을 전달하지 않고 보관해온 것은 이사장과 충분한 사전협의를 통해 보다 의미 있는 노인복지사업에 사용하기 위해 적립해 두었던 것입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후원금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일부 오해의 소지는 있으나 양심을 걸고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도 이 일로 인해 병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다. 소화불량으로 병원을 찾은 동범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판정 이후 1개월 정도 밖에 살지 못했다. 평생을 도덕성과 순수성으로 일관하며 무소유를 당연하게 알고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법정에 선 것을 무척 괴로워했다는 후문이다.

동범이 회장으로 있던 시민사회단체에서는 ‘투병중인 최병준 선생을 도웁시다’라는 유인물에서 당시 “선생이 갑작스레 불치병을 얻게 된 것은 법률위반 혐의로 수사당국에 불려 다니는 과정에서 큰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냥 바라만 보겠습니까. 어찌 선생을 그냥 떠나보낼 수 있겠습니까.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라며 모금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특히 동범 선생이 이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것은 일부 언론에서 후원금 횡령 혐의를 기정사실화 하고 ‘시민단체 대표 거액 횡령 의혹, 사정당국 후원금 1억 개인용도 사용 확인’ 등의 기사를 남발했기 때문이다. 유고집 출판기념회장에 모였던 사람들도 억울한 심정으로 황망히 세상을 등진 동범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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