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삼봉 저녁 강가에서 정도전의 꿈을 되새기다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35)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도담삼봉은 수려한 단양팔경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명승입니다. 영월에서 열세 살의 나이로 대권의 희생양이 되어 한 많은 목숨을 마쳐야 했던 단종의 애환을 싣고 흘러온 남한강이 단양을 휘돌아 가는 물결 한복판에 발을 담그고 우뚝 서 있죠. 원래 정선에 있던 것이 떠내려 왔는데, 해마다 세금을 받으러 오는 정선 관리를 가로막고 도로 가져가라고 호통을 쳐서 물리친 아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정도전이라는 설화가 전해옵니다.

▲ 정도전이 경치를 즐기며 ‘삼봉’이라는 아호를 얻었다는 도담삼봉. 단양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힌다.

생김이 범상치도 않거니와 주변의 경관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 빼어난 풍치를 이루고 있는데, 정도전이 어린 시절 천하를 경륜할 뜻과 슬기를 가다듬었고, 경치를 즐기며 ‘삼봉’이란 아호를 얻은 것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도담삼봉은, 제천에서 단양을 가자면 단양읍 들머리인 도담리에 있습니다. 정도전의 출생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단양 지역민들은 삼봉이란 아호에다 그의 자(字) ‘종지’가 단양읍내 종지봉에서 딴 것이라는 설을 내세워 단양에서 태어났다는 설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듯합니다.

고려말의 정치·경제의 모순을 바로잡고 혼돈의 사회를 수습하고 나선 풍운의 정치가요 혁명가, 주도면밀한 킹메이커, 조선의 사상체계를 정립하고 통치제도를 정비한 실천적 지식인이며 사상가, 고구려의 옛 땅 요동 회복을 꿈꾸던 호남아……. 이런 어마어마한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은 인물로서 이미 후세 사람들에게 전설이 되었으니 어디에 빼앗기고 싶지 않은 콘텐츠일 겁니다.

▲ 정도전의 시조 ‘선인교 나린 물이’를 새긴 시비.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이숭인과 같은 재사들과 함께 학문을 닦았습니다. 21세의 나이로 관직에 나아갔으나 34세 때 유배를 계기로 9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 부패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실감하게 되었고, 진실로 백성을 위한 바른 정치 실현의 이상을 품고 무장이었던 이성계와 손을 잡았습니다. 아마도 혁명에 필요한 물리력, 곧 군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경국전》에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며 군주의 하늘’이라 선언한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의 통치체제는 중앙집권, 통치철학은 민본주의였습니다. 이전의 권력자들이 백성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 정도로 여긴 탓에 정치체계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존재로 인식했던 벽을 극복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즉, 정치는 권력을 쥔 그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한 최고의 활동이라는 정의를 내리게 된 것이니 말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관료주의 혹은 신권주의(臣勸主義) 정치의 주장입니다. 정치공동체, 즉 상징으로서의 군주와 실무자로서의 관료, 그리고 백성의 관계를 정삼각 구도로 놓았던 정도전의 사상은 왕자 이방원(태종)과 숙명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라가 왕의 소유이며 왕실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방원은 정도전의 논리를 왕권에 대한 도전, 왕실에 대한 모욕쯤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정도전은 방원의 칼 아래 명을 달리하고 말았으니,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의 일입니다. 정도전은 스스로 자신을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을 세운 장량(張良)에 비유했다고 하는데, 장량은 나라를 세운 뒤에 토사구팽을 피해 야인으로 돌아가 목숨을 부지했거니와 그는 비명에 갈지언정 끝내 이상을 향해 매진하는 길을 택했던 거죠.

“예부터 한번 죽음이 있을 뿐/목숨을 붙여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네/적막하게도 천 년 뒤에/영웅 열사가 가을 하늘에 빗겨 있네”― 젊은 시절 유배지에서 남겼다는 이 비장한 시구는 정도전의 이상과 일생을 잘 말해줍니다.

도담리 강가 공원에는 두 기의 시비를 뒤로 거느린 좌상(坐像)이 도담삼봉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한쪽 시비에 이런 시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에 흘러들어/반 천년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아희야, 고국 흥망을 물어 무삼하리오”― 선인교나 자하동은 흥했던 고려왕조의 상징일 텐데, 이젠 물소리같이 허울뿐이라며 새 왕조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글로 읽힙니다.

그는 부패한 왕조를 대신할 이상 국가를 세우려는 꿈을 실현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졌습니다. 정도전이 죽은 후에 방원은 정치적 장애물이었던 그를 여지없이 깎아내려 악명으로 덧칠하였습니다. 그러나 집권 후의 통치는 정도전이 구축해 놓은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정치를 둘러싼 권력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괴물이라던 당신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금 소름이 돋습니다.

▲ 단성면 하방리에 위치한 적성산성. 네모 안은 성내에서 발견된 적성비. 신라 진흥왕 때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의 인명·지명·관직명 등이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단양읍에서 영춘으로 향하려니 적성산성을 그저 지나치는 것 같아 맘에 걸립니다. 대교를 건너 수산·청풍 쪽으로 향하노라면 오른쪽으로 산성의 자취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이 적성산성(사적 제265호)입니다. 성은 오랜 세월 속에 대부분 유실되었고 북동쪽 부분만 남아 있습니다.

성 위에 올라보면 그리 높지 않은 위치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 토기나 와편 등 유물이 다량 발견되었으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 조각도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까지 산성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산성 안에서 발견된 적성비(赤城碑:국보 제198호)는 원래 고구려 땅이었던 이 산성이 ‘적성’임을 밝혀준 비석입니다. 신라가 북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죽령을 넘어 단양 땅을 점령하는 일이 불가피했을 터, 비석은 이러한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다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비석의 상단부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새겨진 내용이나 비를 만든 형식으로 보아 신라 진흥왕 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비의 내용은 ‘신라군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앞으로도 이같이 공을 세우는 자는 같은 수준으로 포상할 것’이라는 포고문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내용인즉 치사한 사탕발림이라 생각하니, 그때의 인명·지명·관직명은 물론 법률 제도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어 신라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는 평가도 곧이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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