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이명박 정권에서 이루어진 종편 허가의 가장 큰 정치적 해석은 보수의 영구집권이었다. 우파의 절대적 등받이인 조중동 신문이 매체영향력이 가장 크다는 방송까지 거머쥐게 됐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로 보였다.

실제로 개국 후 1년만에 치러진 2012년 대선에서 종편, 이른바 조중동 방송은 보수정권 재창출의 최고 1등공신이 된다. 야당 후보인 문재인은 종편에 의해 철저하게 매도당했고, 그 결과는 전임 MB 보수정권의 총체적 실패에도 불구 박정희의 대를 이은 박근혜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적나라한 정치담론을 쏟아내는 종편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일반인들조차 사석에서 종편 논리를 그대로 모방하며 국내 정치를 진단하기 일쑤였다. 시골의 노년층들에게 문재인과 이정희 등 야당 후보들이 그 때만큼 빨갱이로 치장된 적도 일찍이 없었다. 예상대로 종편에서 맹활약한 사람들은 박근혜 정권 출범과 동시에 꽃가마를 타고 청와대로 입궁(?)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윤창중 김행 등이다.

그런데 아주 헷갈리게도 꼭 4년 만에 그 종편이 보수권력의 최대 적이 돼 이번엔 반대로 맹활약중이다. 박근혜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미르재단을 처음 건드린 것도 종편이고 최순실 태블릿PC를 특종 보도해 끝내 탄핵 정국으로 이끈 것도 종편이다. 종편의 시청률은 어느덧 지상파를 앞지르고 종편을 백안시하던 사람들조차 요즘은 귀가하자마자 종편부터 틀어댄다. 정규프로를 죽이고 반정부 시위를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는 것도 아마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그야말로 종편이 기가막혀다.

최근의 종편현상에 천착하다 보면 각종 저서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이태리의 석학 움베르트 에코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권력의 미디어 장악에 대해 오히려 역설적(逆說的)인 경우를 실체적 사실로써 공론화 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이탈리아에선 1950~1960년대 기독교 민주주의를 천명하는 우파 기민당이 장악한 TV를 보고 자란 세대가 나중엔 유럽역사에서 가장 전투적인 68혁명세대가 된다. 60년대 이후에는 공산당 세력이 득세하며 미디어에 대한 권력의 간섭과 통제가 극도로 강화되지만 이 때 텔레비전을 보고 자란 세대는 당시 야당 중에 야당이라는 극우 북부동맹의 핵심 지지세력으로 성장한다.

똑같은 현상을 한국사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386세대로 상징되는 80년대 민주세력의 주축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의 이른바 ‘땡 박 뉴스’ ‘땡 전 뉴스’를 보고 자란 사람들이다. 또한 대학의 학생운동이 이념보다는 현실문제로 전이되면서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보수 후보한테 다수의 표를 안긴 20, 30대 유권자들은 김대중 노무현의 진보정권 시절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언론을 접하며 성장한 세대들이다.

지금이야 종편들이 박근혜 퇴진에 동조하고 있지만 불과 얼마전만 해도 대다수 패널들의 논리는 진보죽이기가 대세였다. 이 때문에 역으로 보수에 대한 국민반감이 커졌던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생 혁명’ 등의 깃발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어린학생들이 과연 우리나라의 새로운 투쟁적 세대로 정착될 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세계사를 보더라도 권력의 미디어 장악은 궁극적으로 그 주체들에게 체제 안정보다는 재앙과 불행을 안겼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설을 고민한다면 앞으로 우리나라 종편들은 두가지 의문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는 현재의 지나친, 어느 땐 마구잡이로 펼쳐지는 과도한 정치담론이 과연 한국사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가 멸망하기까지는 진리와는 무관하게 어떤 것이라도 옹호하며 논변하는 소피스트들의 넘쳐나는 변론술이 크게 작용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이들의 대중을 향한 선동과 현혹은 결국 국가의 합리적 의사결정을 방해했다.

또 하나는 박근혜 지킴이에서 졸지에 물어뜯는 승냥이로 돌변한 종편들의 DNA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냐는 것이다. 지금의 박근혜 비판은 어차피 무너질 정권과 거리를 두면서 새로운 보수정권 창출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억측과는 무관하게 이는 언론의 본질문제와 관련돼 있다. 언론이 권력에 휘둘리거나 아양을 떠는 것에 대한 감시 내지 견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시대적 당위성을 곧추세우기 위함이다.

미디어의 역설을 얘기할 때 또 한가지 얼핏 떠오르는 것은 독재권력이 체제의 정당성과 안위(安慰) 확보를 위해 구사하는 세가지 노하우다. 첫째 전임자를 격하하라, 둘째 언론을 장악하라, 셋째 후임자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도망가라. 스탈린이 퇴임을 앞두고 후계자 흐루쇼프에게 하나씩 봉투에 넣어 건넸다는 이것들은 후에 비자금 수사로 처벌을 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한 자리에서 고르바초프가 팁으로 말해줬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이 세가지중 하나도 성공하지 못한 채 탄핵과 퇴진의 위기에 봉착했다. 국정원 등 국가기관까지 동원해 자신의 당선을 도운 전임자 이명박에 대해선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를 내세워 살짝 겁만주다가 손을 뺐고 언론은 극히 일부만 제외하곤 되레 반(反)정부 전사로 만들었다. 또한 후임자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도망가기는커녕 아예 쫓겨나거나 그 이상의 험한 꼴을 당할 처지가 됐다.

그렇다면 박근혜 이후의 미디어 역설은 과연 어디로 꽂히겠는가? 추측컨대 종편의 다음 타깃은 이명박이 되지 않을까. 언론이 정직하지 못하면 역사는 늘 이처럼 악순환으로 점철됐다. 대한민국의 언론은 지금 200만개의 촛불에서 다시 길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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