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김수정 젠더사회문화연구소 ‘이음’소장

▲ 김수정 젠더사회문화연구소 ‘이음’소장

오십을 넘겨 만학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때 잘 알고 지내던 여성계의 선생님은 진심어린 말투로 조언했다. “수정씨, 학부부터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하니 대학을 다시 가면 어때요?” 헐~. 머릿속에서는 4년간의 학비와 시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지 계산이 돌아갔고, 한편으로 “이건 뭐지?”라는 당혹감이 밀려왔다.

나는 소위 말하는 정규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40세가 넘어 방송대를 다녔다. 문화교양학과를 2년 다녔고, 필요에 의해 경제학과로 편입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나에게 방송대를 다니는 것이 벼슬이냐고 비아냥거렸다. 사람들은 대부분 방송대 다니는 것을 숨기는데 너는 왜 그렇게 자랑질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저 재미있고 신나있던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방송대를 다니고 있음을 공표했고, 공부가 재미있다고 입에 달고 떠들었다. 학교에 가기 전 당시의 남자친구는 나에게 공부 못한 열등감이 있냐고 냉소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당근, 그 남자와 헤어졌다.

일정에 따라 한발씩 다가가는 수업은 혼자 하기가 쉽지 않음을 경험으로 알았기에 학교에 적을 두고 진도를 따라 깊이를 더해가는 방식은 흡족했다. 4년의 세월은 나에게 값지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과정을 이수했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학원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그 속에서 나는 불가사리처럼 지식을 먹어치워 소화불량에 걸린 환자처럼 트림을 일삼아야 했다. 철학에 대한 기초가 부족해서 개념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혼돈스러웠다. 결국 직업을 그만두고 온전히 학업에만 시간을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전업학생으로 2년을 지냈다.

나에게 조언했던 선생님이 ‘4년제 정규대학’을 나온 친구들에게 다시 대학을 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누구보다 높은 학력과 명예까지 가지고 있는 그분의 생각에는 소위 ‘정규대학’이 아니면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절대 믿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방송대는 그분에게 ‘대학’이 아니었다. 나는 서운하지 않았다. 억울하지도 않았다. 내가 바친 4년의 세월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정해버리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선생님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각자의 인생경험이 다르고, 깨달음 또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그분의 절대기준을 나는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설득할 방법도 몰랐다. 후로 다른 이를 통해 “진정으로 생각해서 한 말”이라고 전해 들었다. 진심이었다는 걸 안다. 다만 그분이 갖고 있는 가치의 체계를 전혀 회의하지 않았다는 것이 함정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묻고 싶다. 도대체 공부가 무엇인지를.

공부는 자신을 성찰하고 성찰하며 가치 있게 살기위한 기본으로 기간도 없고 기한도 없다.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공부와 삶의 일상에서 지혜를 터득해 가는 과정 모두가 공부다. 책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견주어보는 것,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보이는 면 너머의 진실을 찾고자 회의하는 태도, 그 결과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권력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보게 될 때의 깨달음, 그것이야말로 진짜 공부다.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고 박사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의무교육 이외의 과정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먼 세계의 이야기가 된다. 혜택을 받아 자연스럽게 학위를 취득한 자가 그렇지 않은 타인을 향해 학력이라는 권력의 칼자루를 휘두르게 된다면 학력은 타자를 억압하는 무기로 작동한다. 그것이 공부의 목적인가?

나는 열등감을 갖고 산다. 부와 권력, 외모, 학력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 모든 위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불어 남들을 부러워하느라 항상 진다. 당연하다.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떤가? 전쟁을 겪고 있는 혼돈스런 두뇌로 서늘하게 초점이 잡혀 오는 깨달음이라는 공부, 이는 세상 천지 어디에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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