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문, 적성면 애곡리서 농부의 삶 마감… 권섭은 구담봉 아래 묻혀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34)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단양으로 향합니다. 영동이 충청북도의 남쪽 끝이라면 단양은 북쪽 끝자락이죠. 자치단체로 보면 엄연히 다른 고을인데,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제천과 묶어서 언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충북에서도 아주 외진, 먼 이상향처럼 느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천도 그런 면이 있지만 단양의 말씨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강원·경상도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단양의 말씨와 억양은 충청북도의 일반적인 그것과 사뭇 다른데, 지리적 특성상 강원도의 억양에다 경상도의 빠르기가 섞여서 언뜻 들으면 북한 지역의 말투와 매우 흡사합니다. 대학에 들어가 단양에서 유학 온 친구의 말씨를 듣고 충격(?)을 받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 단양읍 상진리 소금정공원에 있는 신동문 시비. 시 <내 노동으로>를 새겼다.

단양으로 가는 길은 충주에서 36번 도로를 따르는 게 제격입니다. 길은 좁고 굽이굽이 돌지만 남한강을 따라 가는 길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까닭입니다. 원래 단양군의 중심은 지금의 단성면이었으나 충주댐의 담수로 읍이 수몰되고 그곳으로부터 16㎞쯤 떨어진 도전리에 지금의 단양 시가지가 새롭게 조성되었습니다. 한때 단양군수로 왔던 퇴계 이황이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참으로 구하던 바에 맞다”고 칭송했던 단양은 물속에 잠긴 셈이죠. 오늘날 행정구역상 단성면과 단양읍으로 구분되어 있는데도 사람들이 아직도 구단양, 신단양으로 부르는 걸 보면 그 아름답던 강마을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연단조양(鍊丹朝陽)의 절경 때문에 단양이라 했다던가요. 격암 남사고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하여 넙죽 절하고 갔다는 소백산을 끼고 있는 산악지대인지라 평야는 극히 적은 대신 물 맑고 아름다운 계곡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각 고을마다 제각기 팔경이니 구경이니 이름 붙이기를 즐겨합니다만,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구담봉, 옥순봉,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에 이르는 단양팔경이야말로 시인묵객들의 무릎을 치고 발길을 붙잡는 명승이라 할 만합니다. 관리가 되어 왔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러 단양팔경을 구경하러 오거나 어쩌다가 지나거나 하나같이 단양의 풍광에 감탄하며 노래했습니다.

“푸른 물은 단양의 경계를 이루고/청풍에는 명월루가 있다/선인은 어찌 기다리지 않고/섭섭하게 홀로 배만 돌아오는가”―이 시는 단양군수로 왔던 이황이 구담봉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황은 1548년(명종 3)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해 아홉 달 남짓 근무했는데, 이때 그의 인품을 사모했던 기생 두향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야기의 진위를 둘러싸고 설왕설래 말이 많건만, 그러거나 말거나 단성면 주민들은 해마다 5월에 두향제를 열어 그녀를 제사합니다.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니고 효성이 지극한 것도 아니고, 어린 관기로서 당대 최고의 철학자를 맘껏 사랑하고 수절했다는 이야기에 그토록 감동하고 알뜰히 추모하는 마음은 어떤 종류일까요? 손바닥을 뒤집듯 조변석개하는 세태를 반영하여 ‘수절’에 방점을 찍은 것이라고 짐작해 보면서도 ‘어린 여자’와의 사랑을 부러워하는 뭇 남성들의 시선이 느껴진다면, 당신은 망령이라는 핀잔을 놓을까요?

▲ 신동문 시인이 절필하고 단양에 내려와 포도농장을 경영하며 살았던 적성면 애곡리 농가. 거의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길가에 있었다는 두향의 묘를 지나며 슬쩍 시를 읊어 놓고 간 이들은 모두 사내들이었으니……. 조선 영조 때 사람 이광려는 “두향 이름이 사라질 때에/강선대 바윗돌도 없어지리라” 노래했습니다만, 사정은 바뀌어서 둘이 함께 시문을 주고받으며 청유했다는 강선대 바윗돌이 먼저 물속에 잠겨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유람선을 띄우고 강을 오르내리며 두향 묘를 바라보고 갸륵함을 가슴에 새기니 그 이름은 웬만해선 지워질 것 같지 않습니다.

곳곳이 절경이며 역사유적이라 가볼 곳이 많은 단양인데 한곳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1790년 여름, 울산에 갔다가 죽령을 넘어와 단양의 사인암에서 묵었던 정약용은 마침 임금의 명을 받고 바삐 상경해야 하는 일정 때문에 그야말로 주마간산으로 구담봉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후에 그는 <단양산수기(丹陽山水記)>에서 옛 시인의 글을 빌려 적기를 “미인을 보았는데 얼굴은 아름다웠으나 그 자태는 기억할 수 없다”며 이때의 서운함을 토로하였습니다. 제비봉에 올라 구담봉을 휘돌아 가는 강물을 멀리 바라보노라면 이만한 풍광이 다시없을 듯 눈앞이 시원해집니다.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죠.

그런 구담봉 아래 유택을 마련한 권섭을 시샘하며 사인암으로 향합니다. 결연하고도 위태로운 벼랑의 결기 앞에서 고려 말의 성리학자요 문신인 우탁의 시조 한 수 읽는 멋 또한 단양에 온 보람으로 꼽을 만합니다.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도끼를 들고 임금에게 소신을 간한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疏)의 원조 격으로 명성이 높고, 홀로 서도 두렵지 않다(獨立不懼)고 호언할 만큼 짱짱하던 그이도 늙음 앞에서는 쩔쩔매고 한탄하는 모양이 생각할수록 재미있습니다.

단양읍으로 향하는 길에 왼쪽으로 강 건너편으로 ‘수양개 선사유적 전시관’이 눈에 들어옵니다.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 선사유적은 남한강 상류 충적지대에 발달한 ‘한데(들판)유적’으로 후기 구석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입니다. 출토유물의 수가 무려 3만여 점에 달하고 원형의 보존 상태가 좋아 당시 수양개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고 합니다.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이 오래전의 살림살이를 엿보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얼른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먼 옛날보다, 그들이 살았던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침묵했던 신동문 시인의 삶에 마음이 머뭅니다.

새 바람을 일으키며 한창 전성기를 맞았던 신동문의 절필 선언은 한국 문단에서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1964년 그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 <바둑과 홍경래>에서 “내 마음 속의 생각은 바둑을 두면서도 농부가 부러웠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홍경래를 생각했다”고 적었는데, 그래서였을까요? 애곡리에 내려온 신동문은 포도농장을 경영하면서 1993년 가을 담도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철저하게 농부의 삶을 살았습니다. 글이라면 엽서 한 장도 쓰지 않는 오기를 부렸으나 그는 생전에 ‘시를 쓰는 고통보다 쓰지 않는 고통이 더욱 컸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쓰고 싶은 유혹과 자극을 떨쳐 버리기 위해 문학책은 모두 치워 버리고 그가 가까이 했던 책은 오직 침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독학으로 익힌 침술로 이웃들에게 무료 의술을 베풀어 마을 사람들에게 ‘신바이처’라는 별명을 들었다는 얘기며, 침 맞으러 온 사람들에게 돈을 안 받는 대신 노래 두 곡을 부르게 하여 긴장을 풀고 시술을 하곤 했다는 얘기가 아직도 회자됩니다. 다 허물어져 겨우 흔적만 남은 그 농가 마당에서, 시를 버리고 스스로 이야기가 되어 남은 시인을 생각하노라니 단양의 절경들이 죄다 폐허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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