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민주주의라는 것은 원래 최선의 선택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의 트럼프 당선만 보더라도 그렇다. 다만 최악을 피해보자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대한민국은 그 민주주의라는 제도 때문에 유사 이래 ‘최악의 대통령’을 기록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 국민은 분명 박근혜라는 대통령을 투표로써 뽑았는데 그 위에 또 다른 사인(私人)의 대통령이 있었다는 사실, 이건 헌정유린이 아니라 아예 말살이라고 봐야 맞다. 세계사를 보더라도 권력의 사유화는 필히 나라에 망조를 안겼다.

우리는 ’87년 민주화 이후 여섯 명의 대통령을 가졌지만 단 한번도 성공한 지도자를 누리지 못했다. 약속이나 한 듯 임기 말에 하나같이 스스로의 부정과 측근·친인척 비리로 비참하게 좌절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역대 대통령을 떠올리게 되면 임기 초반의 당당하던 모습과 말년의 초라한 모양새가 쉽게 매치되지 않아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퇴임 후 그나마 평탄한(?) 삶을 살고 있다는 MB조차 지금의 국민여론을 듣다 보면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다고 봐야 할 것같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은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 여기에다 지난 대선에서의 국가기관 선거개입을 생각한다면 지금 그의 잠자리도 분명 가시방석일 게 틀림없다.

이런 의문을 한번 가져본다. 대선 후보 중에서도 현재 빅3로 꼽히는 반기문 문재인 안철수가 차기 대통령을 한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정답은 어림 택도 없다는 것이다. 임기 초에는 절대 군주로 군림시키다가 임기 말만 되면 동네북으로 전락시키는 우리나라의 초현실적 대통령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인간들이 일궈 온 정치라는 ‘문명’을 고민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의 가장 큰 딜레마는 정치지도자들의 독선과 이기심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민중에 의한 지배’라는 뜻을 가진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사, 즉 다수결이라는 원칙때문에도 정치지도자들의 집단적 독선에 쉽게 휘둘린다는 맹점을 안고 있다. 무슨 친박이니 친노니 하는 것들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데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제도보다는 오직 인물에서 정치의 선의를 기대하는 크나큰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때마다 후보가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지자들이 후보를 우상(偶像)으로까지 만드는 것이다. 대기업 CEO 출신인 이명박은 경제발전의 수호신쯤으로 우상화돼 대통령에 당선됐고 원칙과 신뢰를 내세운 박근혜는 역시 나라를 바로 세울 지도자상(像)으로 상징화돼 권력을 잡았지만 그 끝은 모두 실패로 결론났다. 이는 갑작스런 현상이 아니라 예견된 결과다. 이유는 이렇다.

우선 최창집 교수를 거론할 필요가 있다. 2년 전 그는 안철수 싱크탱크인 ‘정책 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을 맡았다가 불과 3개월만에 사퇴하면서 “안철수가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이 너무 도덕적이다”고 비판했다. 누구보다도 대중들에게 깨끗한 이미지로 어필하며 ‘착한니즘’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 안철수를 놓고 최창집은 오히려 그 도덕적인 추구가 정치를 그르치고 있다며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최창집이 바란 것은 안철수라는 인물에 의한 일방통행식 정치해법이 아니라 제도적 시스템에 의한 절차적 정치추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대중의 음해에 의해 죽게 되자 철인(哲人)정치를 더욱 곧추세우게 된다.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철학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정의국가라고 단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 소크라테스조차 말년엔 “개인이 아무리 정의를 지킨다 해도 다른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고 외쳐댔다. 결국 플라톤의 실수는 ‘정치는 선하다’고 착각한 것이다. 대선 때마다 특정 후보를 우상으로 만들고 그에게 모든 선(善)을 기대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치적 DNA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도덕적인 지도자라고 해서 권력의 일탈과 부패를 막을 수는 없다. 인물보다 더 시급한 것은 권력을 제도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드는 일이고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근본이 된다. 그러기에 현행의 대통령제는 반드시 고쳐져야 하고 개헌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가 됐다. 지도자가 도덕적 양식과 품성을 가졌고 또 이를 대중에게 전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가 되겠지만 우리는 늘 이런 것에 목말라했고 그 후유증을 여지없이 겪어왔다.

조직의 크고 작음을 떠나 그 지도자에 요구되는 덕목은 분명하다. 형제 자매와 서로 어우러져 사는 정상적인 가정, 돈보다는 노력으로 쟁취하는 정상적인 교육, 구중궁궐의 공주님 삶을 벗어나는 정상적인 교우관계, 주술에 취하는 대인관계가 아닌 정상적인 사람들과의 사회관계... 이런 것들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지도자도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철인이 아니라 이같은 상식의 지도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들은 다시 상식의 대통령 후보가 아닌 작위적인 우상(偶像)을 조각하며 그들에게 또 모든 것을 걸려 한다. 정직한 사람 문재인, 도덕적인 안철수, 글로벌한 반기문을 합창하며 마치 위기의 한국을 일거에 구해줄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권력을 잡는 순간 대통령의 불행은 어김없이 반복된다. 이것이 정치다.

인간 박근혜는 정치인(국회의원) 박근혜까지는 가능했을망정 ‘대통령 박근혜’가 되기엔 애초부터 부적절했다. 온 국민의 엄청난 회생으로 얻은 이 교훈이 그나마 요즘 위안이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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