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세평 / 권나경 꿈꾸는책방 점장

▲ 권나경 꿈꾸는책방 점장

멋부리기를 좋아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가서 뭘 공부할까를 고민하기보다 오늘은 뭘 입을까를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놀러가기 바빴습니다. 또 꾀병을 부려 조퇴를 하고는 친구랑 손잡고 시내를 활보하는 게 공부보다 더 쉬웠지요. 그런 나에게 ‘만일 그 시절 그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싶을 만큼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책이 두 권 있습니다.

그 중 한 권이, 지금은 소풍을 끝내고 저 세상으로 돌아가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입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전태일 열사.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을 별다른 수식 없이 우리에게 알려 주던 책, <전태일 평전>.

부모님 밑에서 먹고 입을 고민 안 하고 편안하게 살던 나에게 전태일 열사의 삶은 참으로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몇 천 원 남짓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던 평화시장 피복 노동자 전태일. 그럼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빵을 사 주고 자신은 걸어 다녔던 그의 삶은 마치 딴 나라 이야기 같았습니다.

작은 공간, 게다가 한 층을 둘로 나눠 허리조차 펼 수 없는 작업장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먼지를 코로 입으로 마셔가며 일하던 피복 노동자들, 일명 ‘시다’라 불리던 그들의 삶은, 단지 그들만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배운 것 없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착취당하고 억압받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책 읽는 내내 전태일 열사뿐 아니라 내 또래 여공들의 고단한 삶을 마주 대하기가 얼마나 힘겨웠던지, 지금도 평화시장 근처에 가면 가슴 한 편이 답답해집니다.

갓 스물을 넘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뉴스에 나옵니다. 한 달 생활비로 수천 만 원을 썼다는 비선실세의 딸 정유라 씨. 수업 일수가 모자라는데도 문제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조작된 성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갔다고 하지요. 대학에 진학해서도 말을 탄다며 학교 수업을 등한시하고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해 온 그에게 대한민국 초일류 기업 삼성이 수십 억을 건넸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대학 진학 대신 택한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려 숨진 고 황유미 씨가 있습니다. 청춘이라는 말의 뜻을 새기기도 전인 스물셋에 세상을 떠난 그에게 삼성이 건넨 돈은 고작 50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의 46주기입니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전태일 열사가,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반세기가 지났어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착취를 당하고 기계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노동자가 곳곳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를 외치는 이 나라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보며 피울음을 쏟지 않을까요?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의 뉴스가 전해지는 11월, 그 소식을 전태일 열사가 듣지 못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비 온 뒤 쌀쌀해진 날씨가 더욱 춥게 느껴집니다. 그리고는 참으로 쓸데없는 상상을 해 봅니다. 비선실세의 딸이 스무살 시절, <전태일 평전>을 읽었더라면, 그의 삶도 달라졌을까? 하는,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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