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넘을 일 없는’ 박달재, 박달도령-금봉낭자의 ‘주객전도’ 설화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32)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박달재를 넘습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하는 유행가 가사 때문에 ‘천등산 박달재’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천등산과 박달재’를 잇달아 넘는다는 말이겠고, 실상 박달재는 봉양면 원백리와 백운면 평동리를 잇는 고개이며 천등산은 충주시 산척면과 제천시 백운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다릿재를 통해 넘나듭니다. 덩치가 크고 무거워 엉금엉금 기는 시멘트 차량을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개를 넘던 진풍경을 연출하던 것도 아득한 옛날얘기가 됐고, 벌써 15년 전인 2001년 터널이 완전 개통되면서 박달재는 고개로서의 체통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울고 넘을 일이 없는 박달재를 유람 삼아 느릿느릿 넘습니다.

▲ 지난 2001년 터널이 개통되면서 박달재는 고개로서 체통을 잃고 유원지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 중엽, 영남의 선비 박달이 과거를 보려고 한양을 향해 떠났다죠. 새재를 넘었다면 제천으로 갈 일이 없이 목계에서 배를 탔을 테니 아마도 죽령을 넘었던 모양입니다. 단양에서 청풍을 지나 박달재 아래서 묵었다면 아마도 봉양 원백리나 백운 평동리쯤 되었겠죠. 헌데 주인집 딸 금봉이와 사랑에 빠져 떠나지 못하고 지체하다가 급제해서 돌아오겠노라 약속하고 한양으로 떠난 후 때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이라면, 과거 보러 가는 인간이 사랑타령 할 때 진즉에 알아봤을 텐데 금봉이는 그런 눈썰미가 없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금봉이는 애가 타서 죽고, 낙방거사가 되어 차일피일 미루다 뒤늦게 돌아와 금봉이 소식을 들은 박달은 며칠을 두고 고갯길을 헤매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두 젊은이의 슬픈 사랑 얘기가 얽힌 그 고개를 박달재라 불렀다는 겁니다.

밑도 끝도 없는 얘기라도 일단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만 하면 사실보다 큰 위력을 갖게 된다는 걸 다시 확인합니다. 남성 중심의 사고구조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오늘날 페미니스트의 시각이라면 왜 둘이 사랑을 했는데 어째서 금봉이는 빠지고 박달만 기리느냐고 타박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 소견에도 금봉잇재가 아니라 박달재라고 부르는 건 주객이 전도된 걸로 보입니다. 거기는 금봉이네 동네고, 막말로 박달은 뜨내기 아닙니까.

반야월 노래비 ‘친일협력 단죄문’

이런 객쩍은 시비가 아니라도 박달재는 애꿎은 구설수에 올라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울고 넘는 박달재>의 노랫말을 쓴 반야월(본명 박창오)의 친일행적이 알려지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자 제천의 시민단체가 노래비 옆에 ‘친일협력 단죄문’을 만들어 세운 건데요. 일이 이쯤 되자 반야월 기념관을 건립하려고 공사계약을 했던 제천시도 덩달아 횡액을 만나 사업을 백지화하고 계약금을 물어주는 홍역을 치렀습니다. 세상이 다 망한 것 같다가도 이런 소동을 보면 잠깐 안도의 숨을 쉽니다. 북미 원주민 아라파호족들이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르며 위안을 삼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 봉양읍 공전리 자양영당 옆에 건립된 제천의병전시관. 1895년 을미의병 중 규모가 가장 컸던 제천의병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금봉이의 애틋한 사랑얘기보다 먼저 박달재는 유서 깊은 전적지로 기억돼야 합니다. 고려 고종 4년(1217)에 김취려 장군이 거란의 장수 질명(質明)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크게 무찔렀는데요, 거란군이 박달재 싸움에서 주력부대를 잃고 달아남으로써 경상도 이남의 땅이 난을 면했습니다. 또 고종 45년(1258년 충헌왕) 몽고군의 침입 때는 충주·제천·청풍의 별초군이 합세해 적을 격파한 곳도 박달재였습니다.

특히 박달재는 구한말 의병활동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1895년 ‘1차 의병’으로 불리는 을미의병 중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났던 곳이 제천이었으며, 고개 아래 봉양읍 공전리가 을미의병 총본부가 있던 곳입니다.

“무릇 우리 각도의 충의의 군사들은 고루 성조(聖朝)가 배양한 사람들이나 환란을 피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일어나 그것을 치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으랴. 비록 가장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어도 사람이 능히 백배의 힘을 더한다면 원수와 같이 살 수 없는 와신상담의 생각이 더욱 간절해질 것이다. (…) 이로써 사람에게 포고하노니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궁사서민에 이르기까지 누가 애통절박한 마음이 없겠는가. 진실로 위급존망의 때라. 각자가 다 거적자리를 깔고 방패를 베개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아무리 어렵고 위태한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 가는 나라와 천하의 도의를 다시 만들어 천일(天日)이 다시 밝도록 하라.”

강원도 춘성군 남면 출신으로 당시 제천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유인석의 이름으로 전국에 띄워진 격문 <격고팔도열읍> 일부분입니다. 유인석은 격문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의사들을 정비하여 군을 편성하고 총대장이 되었습니다. 그 의병 부대가 충주의 일본군을 치기 위해 진군할 때 박달재를 넘어갔고, 18일 동안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패하여 물러나와 재집결했던 곳도 박달재였습니다. 제천의병의 진원지였던 공전리에 자양영당이 남아 구국의 창의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거니와 매년 10월에 제천의병제가 열려 그 얼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 제천시 신동 마을 앞 공원에 건립된 권섭 문학비. 그의 국문가사 <영삼별곡> 중 두 구를 새겼다.

권섭의 ‘황강구곡가’ 문학비 눈길

재를 내려와 중앙고속도로 제천IC를 지나면 곧 신동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길가에 작은 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그곳에 조선 숙종~영조 연간의 시인 권섭(1671~1759)의 문학비가 있습니다. 성리학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사고로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던 권섭은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백부이자 스승이었던 권상하가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청풍 황강으로 내려오면서 제천과 인연을 맺었고, 단양 장회리 옥소산에 묻혔습니다. 평생을 시주(詩酒)를 벗 삼아 여행으로 살다시피 한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89세로 장수하며 친필문집 50여 권 속에 시 2000여 수와 <황강구곡가> 등 국문시조 75수를 남겼습니다.

“벗이야 있고 없고 남들이 웃으나마나/양신미경(良辰美景)을 남 때문에 아니 보랴/평생에 이 좋은 회포를 실컷 펴고 오리라”― 5편 연작으로 이루어진 시조 <독자왕유희>는 친구들이 유희에 지쳐 함께 놀아주지 않을지라도 좋은 시절에 나 혼자라도 실컷 놀아보고 싶다는 뜻을 펼친 작품입니다. 이 밖에도 청풍·황강·한수 등 제천 지역의 명소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고, 이 가운데 청풍강변 능강 마을을 말년에 편히 쉴 만한 곳이라고 노래한 작품도 눈에 띕니다.

특히 국문으로 쓴 <영삼별곡(寧三別曲)>과 <도통가(道通歌)>는 조선 가사문학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학계에서는 권섭이 정철·박인로·윤선도 등 조선시대 3대 가인에 못지않은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뭐라 하든, 일 없이 고민도 없이 유람으로 일관한 삶이 부럽긴 합니다만, 그렇게 일생을 마친 사람의 글을 나는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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