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이 낙마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0월30일 최순실 게이트의 불길을 잡아보려고 이원종 비서실장과 측근 3인방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원종 전 비서실장이 국감에 출석해 (최순실의 대통령 연설문 수정은)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에 차 말했던 것이 10월21일이다.

그로부터 나흘 뒤 대통령이 사실관계를 시인하며 국민 앞에 머리를 숙였다. 이 전 실장은 그 다음 날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실장의 말과, 사실은 달랐지만 전제는 옳았다. 대한민국은 봉건시대 이전의 암흑기다.

나오기는 잘 나왔는데 나오게 된 시점과, 애당초 들어간 것이 아쉽다. 이원종 전 비서실장은 고향 충북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던 인물이었다. 관선 한 차례, 민선 두 차례, 모두 세 차례 충북지사를 역임하고 정점에서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이 전 실장은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은퇴 후 성균관대 석좌교수로 강단에 서면서 선비로 늘그막을 장식할 줄 알았다. 번번이 국무총리 하마평에 올랐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총리에 등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비정치적인 성향 때문이다. 대통령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도 나서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이 전 실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공중전화 수금원으로 일하다가 행정고시를 통해 관직에 입문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자민련, 한나라당 당적으로 도지사를 지냈지만 정치색을 드러내길 꺼렸다. 소속 정당에 대한 충성보다는 오히려 공무원 조직에 대한 믿음이 컸다. 주민들이 다 수긍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공직사회 내부에서는 행정의 달인으로 통했다.

이 전 실장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관계망을 형성하는 능력자였다. 1993년 1월 관선 충북지사 시절 청주에서 우암상가가 무너져 무려 28명이 죽고 50여명이 다쳤지만 불과 두 달 뒤 서울특별시장으로 영전했다.

1994년 10월 관선 서울시장 시절에는 성수대교가 내려앉아 32명이 죽었지만 청주 서원대 총장으로 재기한 뒤 민선 충북지사에 당선됐다. 우암상가 붕괴 당시 취재를 위해 내려온 기자들의 숙소를 일일이 방문해 아침마다 방문을 두드려가며 속옷을 챙겼다는 뒷얘기를 들은 바 있다.

명철함도 빛났다. 1998년 민선 2기 충북지사에 당선된 뒤 지금은 고인이 된 조영창 당시 기획관리실장을 정무부지사에 임명했다. 그때 이원종 충북지사가 했던 브리핑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첫째 IMF로 인해 공직에도 구조조정 바람이 부는 마당에 내부에서 인재를 발탁해서 공직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의도, 둘째 적진에 있던 사람을 중용함으로써 아량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으며, 셋째 조영창 실장은 몸을 도끼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조영창 기획실장은 선거 당시 현직이었던 주병덕 지사의 선거운동을 도왔기에 좌천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조 실장을 기용한 것도, 브리핑 내용도 반전이었다.

무엇보다 이 전 실장은 지사 퇴임 후 자신은 ‘흘러간 물’이라며 후임 지사 누구에 대해서도 단 한 마디도 촌평하지 않았다. 취재를 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그 한 마디가 아쉬웠지만 ‘이 사람은 여생에 실수는 하지 않겠구나’ 하는 믿음도 생겼다.

그런데 그가 2026년 5월, 몰상식한 폭주정권의 비서실장이 됐다. 불과 5개월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사실 잃었다기보다는 좋지 않은 인상들이 과거의 기억들을 덮어썼다. 혹자는 권력에 대한 노추(老醜)를 보여줬다고 한다. 국감에서 봉건시대 운운했던 것은 최순실의 국정농단 대해서 정말 몰랐기 때문이 아니겠냐고도 말한다. 위로의 말 같지만 ‘껍데기 비서실장’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시간에도 도플러효과가 작용한다. 지나간 것은 멀고 다가올 미래는 가깝게 느껴진다. 공무원과 선출직 시절에 대한 좋은 기억들은 아련해지고 노욕을 부려 권력에 부역한 비서실장 5개월에 대한 기억만 남게 될 것 같다. 알쫑이(별명) 이 지사가 아니라 굴종의 비서실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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