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륜의 <남한강>·신경림의 <목계장터> 강마을 민중들의 삶 품어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31)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그 옛날 고려와 조선조/뱃길이 발달하였다는 이 물줄기에/오늘은 다만 글자와 화상 뭉겨진 조상만 남았고/곡식과 소금이 오르내리던 장삿배의 그림자는 그쳤다./지난 한때는 공산군과 대진하여 총탄과 포화가 서로 맞서던 곳/예 있던 집 간 곳 없이/주추만이 남은 빈 자리에/지금은 무우, 배추꽃이 한창이다./원포에는 돌아오는 돛단배도 있었다면/평사에는 기러기 짝지어 내려앉음도 있었으리./마음에 그려보는 조부(祖父)의 멋./내가 그 멋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듯/강물이 흐른다.”

▲ 교현동 충주체육관 앞 잔디밭에 서 있는 박재륜 시비. 그의 시 <남한강>이 새겨져 있다.

남한강 유역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그림처럼 그려낸 시 <남한강>을 쓴 박재륜(1910~2001)은 가금면 가흥리에서 출생했습니다. 목계나루 건너편, 조선시대 가흥창이 있던 마을입니다. 궁내부 주사였던 그의 조부가 한일강제병합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옴으로써 박재륜의 유년시절은 남한강의 아름다운 정취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된 셈입니다. 고향에서 지낸 30년 간의 삶을 ‘은총과 혜택의 생활’이라고 회고했거니와 박재륜이 한시에 능하고 품성이 후덕한 일면들은 모두 조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24년 서울 휘문고보 시절 문학의 길로 들어서 이병기를 스승으로 박종화, 이태준, 이무영, 정지용, 오장환 등과 교분을 쌓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던 1930년 《조선지광》에 <편지>, <강촌연곡>을, 이듬해 《신여성》에 산문시 <미스 R號의 風船球>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40년 <잠오지 않는 밤의 노래> 외 5편의 작품을 발표한 이후 혹독해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절필하고 말았습니다. 6·25 피난 중에 고향에 돌아와 정착한 후 1958년부터 작품 활동을 재개하여 시집 《궤짝 속의 왕자》, 《메마른 언어》, 《田舍通信》, 《설령 높은 마루》와 시문집 《인생의 곁을 지나면서》 등을 남겼습니다.

민중시의 대표작가 신경림

광복 이후 활동한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 꼽히는 신경림(1936~ )은 노은면 연하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충주고등학교 시절 신경림을 시의 길로 이끈 유재형은 《조선문단》에 <낙엽>, <새벽에 올린 기도>, <가을밤> 등의 시를 발표했고, 시집 《대추나무 꽃피는 마을》을 펴낸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평론가이자 영문학자로 《비순수의 선언》 등의 평론집을 낸 유종호의 부친이기도 합니다.

 

▲ 노은면 연하리 노은초등학교 교정에 건립된 신경림 시비. 시 <농무>를 새겼다.

신경림은 1955~1956년까지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문학예술》에 시 <낮달>, <갈대>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습니다. 한때 절필했다가 1965년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이후 초기 시에서 두드러졌던 관념 세계를 벗어나 <원격지>, <산읍기행>, <시제> 등 고통 받는 농민의 애환을 노래했습니다.

그의 시는 우리나라 리얼리즘 시를 대표합니다. 1970년대 우리 사회가 근대화로 줄달음치던 무렵 그 이면에서 고통 받던 민중들의 아픔을 대변했거니와 1970년대의 민중시는 신경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구경꾼들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 뿐/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산 구석에 쳐박혀 벌버둥 친들 무엇 하랴/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971년 발표한 시 <농무(農舞)>는, 1970년대 황폐해지는 농촌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농민시’의 대표적 작품입니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 활력을 잃고 무기력해지는 현실 앞에서 술로 슬픔과 절망을 잊거나 춤을 통해 잠시 달래는 농민들의 애환이 생생합니다. 백발의 노인들만 남아 적막한 오늘날 농촌과는 또 다른 풍경입니다. 한 해 쌀 소비량이 커피 소비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 논 열 마지기에 벼농사 지어 수확하면 150만원 손에 쥔다는 말은 넋두리에 끼지도 못하는 현실. 시에서 ‘농무’는 농민들이 삶의 울분과 한을 극복하는 수단이겠죠. 작품 후반부의 신명은 농민들의 처절한 저항의 몸짓에 다름 아닙니다.

▲ 신경림 생가 마을. 느티나무 앞 신경림 시인의 생가(동그라미 안)에는 현재 다른 주민이 살고 있다.

수몰전 강마을 모습 ‘달넘세’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떠돌이 장사꾼들의 삶의 공간인 목계 장터를 중심 제재로 하여 민중들의 삶과 강한 생명력을 토속적 언어로 담담하게 그려낸 <목계 장터> 또한 신경림의 대표작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은 시를 여러 편 읽습니다. 햇볕 좋은 가을날 오후 강가에 앉아 시를 읽는 행복, 얼마만인가요. 신경림은 또 1970년대 중반 자유실천문인협회를 건설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숱한 문학경연을 통해 민중들에게 희망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1985년 펴낸 시집 『달넘세』에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지경에 놓인 강가의 마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시가 여러 편 실려 있습니다.

첫 시집 《농무》를 시작으로 2011년 《낙타》와 2014년 《사진관집 이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집을 펴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는 시구로 유명한 시 <가난한 사랑노래>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죠.

한편 신경림은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뛰어난 산문을 쓰는 문장가로 기억될 만합니다. 《민요기행》이나 《시인을 찾아서》 등을 통해 우리 국토를 발로 디디며 잊혀가는 노래를 발굴하고 문학인들을 복원시킨 일은 그가 이룬 큰 업적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시인, 아직 생존해 있는 그를 굳이 이 자리에 내세우는 까닭, 이만하면 넉넉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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