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다려서 거스름돈 주는 금곡상회 신중휴 씨
애들에게 나쁜 단 것 치우고…소주·담배만 팔아

토박이 열전(16)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같은 청주 하늘 아래에서도 이곳의 태양은 더 빨리 지는 것 같다. 사람들로 붐비는 육거리시장에서 두어 골목을 돌아들자 대부분 점포들은 이미 문을 닫았고, 불 켜진 점포들도 ‘철시(撤市)’를 서두르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이제 고작 오후 5시50분이다. 과거 ‘이소아과 골목’으로 부르던 남주동 양품점 골목의 영화가 아득하기만 하다.

1990년 이전만 하더라도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활보할 수가 없는 골목이었다. 정말 그때 그 골목이 맞나 싶다. 그때는 시장표 여성복이나 아동복, 속옷, 화장품 등 이른바 ‘양품점(洋品店)’ 류가 주를 이뤘다. 지금은 아예 장사를 하지 않는 빈 점포도 적지 않다. 불이 꺼지지 않은 곳들은 찌개나 내장 따위에 소주, 막걸리를 파는 선술집들이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 비해 허름한 술집들이 늘었다.

불 켜진 곳들을 기웃거리며 걷는데 금곡상회라는 정체불명의 가게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문을 열자마자 신발을 벗어야 올라갈 수 있는 마루가 있는데 파는 물건이라야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소주와 담배뿐이다. 아무리 작은 구멍가게라고 하더라도 있어야할 과자부스러기나 통조림조차도 없다. ‘담배 한 갑을 달라’며 백발의 쥔장을 불러내고는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갔다. 가게를 찾은 취지를 설명해도 의심을 눈길을 거두지 않으며, 명함에 신분증까지 보잔다. 금곡상회 쥔장은 신중휴 씨였다.

“여기가 남주동 60번지요. 전에는 김을 굽는 가게였는데 내가 61살에 이 집을 사가지고 왔으니까 꼭 20년 됐네. 내가 병자생(1936년)이거든. 이 동네 형편없을 때 온 거야. 깡시장(야채·과일도매시장) 옮기고 나서 들어왔으니까. 내가 그 전에는 운수업을 했었는데 여기 깡시장에 물건 싣고 오려면 브레끼(브레이크) 잡을 때마다 차가 쭉쭉 미끄러져요. 바닥에 채소 찌끄래기(찌꺼기)가 짓이겨져서 장화 신고 다녀야하고, 냄새가 나니까. 그래도 요 앞에 주유소에 차들이 줄을 설 정도로 장사가 잘됐지. 그런데도 주민들이 데모하고 별짓 다했던 거요. 그래서 깡시장 몰아냈는데 그때부터 장사가 안 되는 거지. 이 동네사람들이 다 ‘쑥맥(숙맥·菽麥)들이지, 뭐.”

가게를 둘러보니 소주와 담배 외에도 빛바랜 음료수 상자와 라면, 계란 따위도 눈에 들어온다. 한 구석에는 지나간 시대의 소주들이 진열돼 있다. 예전의 충북술 ‘백학’이 반갑다. 파는 게 아니라고 했다. 20년 장사를 하면서 새로운 소주가 들어올 때마다 기념으로 한두 병씩 모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먼지가 앉은 낡은 계산기와 손때 묻은 5열 주판도 눈에 들어온다. 주판은 50년 전부터 쓰던 거란다. 그동안 장사를 해온 내력도 들을 수 있었다.

“금곡상회는 옛날에 수동에서 장사를 할 때부터 쓰던 이름이야. 그때는 한복장사를 했지. 금곡의 금은 ‘비단 금(錦)’자야. 옷감을 파니까 붙인 거고, 곡은 ‘곡식 곡(穀)’자. 우리 아들이 농협에서 양곡을 담당했거든, 그래서 금곡상회…. 처음에는 사탕이고 과자고 단 것들도 팔았지. 그런데 내가 내 손자들한테는 단 것 몸에 나쁘다고 먹지 말라고 하면서 남의 손자들한테는 파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고. 그래서 어른들만 먹는 거 술, 담배, 라면, 계란만 남겼지.”

어느 날 애가 돈을 입에 물고 왔더란다. 그때 애들한테 해로운 건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과자나 사탕이 팔리고 나면 다시 안 들이고 그걸 다 없애는데 3개월 걸렸단다. 과자를 없앤 지 근 10여년이 됐는데, 그때부터 돈을 다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고개는 끄덕였는데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애들한테 해로운 사탕은 팔지 않는데, 어른들에게 해로운 술, 담배는 팔아도 되나요?’ 그래도 묻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백발의 쥔장이 돈통을 열어가며 역설한 얘기들이 마음에 남는다.

“내가 매일 다리미로 돈을 다리잖아. 6시30분에 가게 문 열어서 40분 동안 안팎 청소하고, 물 데워서 씻고, 7시40분부터 다리기 시작하는데 한 40분 정도 걸려요. 1000원 짜리로 6,7만원, 5000원 짜리도 다리고…. 그 다음에 아침밥을 뜨는 거예요. 새 돈은 손님들 거슬러 주고, 중간급은 내가 물건 살 때 쓰고, 상태가 나쁜 것은 은행에 가서 바꾸거든. 돈을 우습게 알면 안 되는데….”

돈 다리는 걸 보러 아침 댓바람에 올 자신이 없어서, ‘지금 시범을 보여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겹겹 포갠 광목천을 깐다. 카지노의 딜러처럼 능숙한 솜씨로 1000원짜리 지폐를 쌓았다가 펼치더니 한 장씩 다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니 경건한 의식을 집행하는 집례자의 표정과 눈빛이다. 누렇게 탄 광목천이 그동안 돈을 다린 내력을 말해준다.

밖에서 가게를 보며 단칸방이 하나 딸려있겠지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가게 안쪽으로 마당이 넓은 집이 있었다. 앞에서 볼 때 가게 네 칸이 모두 이 집에 딸린 구조였다. 한 칸은 금곡상회, 한 칸은 금곡상회의 주류창고, 나머지 두 칸은 세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적벽돌로 올린 3층집이 붙어있었다. 3층이라야 상가 위에 2층 단칸, 그 위에 옥탑 구조의 좁은 건물이다. 세를 줄 수도 없을 만큼 낡은 건물 곳곳에 화분 따위를 놓아 작은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 꼭대기에 오르니 남주동, 육거리가 내려다보인다. 그래도 이 집이 버스회사 사장집이었단다.

“이 밑에를 보시오. 다 쓰러져가는 집들뿐이잖아요. 육거리시장도 저렇게 아케이드를 씌워놓았지만 다닥다닥 붙어있어 화재에 취약한 상태거든. 거기에다 가운데 노점이 있어 물건 사려면 궁둥이에 사람이 부딪히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야. 저 뒤에 있는 저 집들을 철거하고 저리로 노점상들을 입주시키면 시장도 깨끗해지고, 시장보기도 편리해질 텐데…. 그 얘기 좀 써주쇼.”

처음에 경계심을 보이던 쥔장이 나를 환대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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