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홍구범, 열정적 창작으로 ‘조선의 발자크’·‘화제작 제조기’ 정평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30)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홍구범은 이흡보다 15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신니면 원평리는 신청리와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잇대어 있는 마을이니 두 사람의 고향이 같다고 해도 크게 잘못 된 말은 아닐 듯합니다. 정호승에게는 8년 후배가 되는 셈이죠. 홍구범은 치밀한 소설 구성, 특히 역설적 기법으로 감동적인 작품을 많이 남기며 1940년대 소설문학을 가장 든든하게 떠받친 소설가로 평가받는 작가입니다.

▲ 신니면 원평리 생가터 인근에 건립된 홍구범 문학비. 수필 <작가일기> 한 부분을 새겼다. 석조여래입상 앞 절집 뒤꼍에 옹색하게 서 있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백민》이란 잡지, 당신은 혹 들어보았나요? 1945년 12월에 창간되어 1950년 3월까지 발행됐던 종합문예지로서 ‘백의민족’을 줄여 쓴 제호와 ‘계급 없는 민족의 평등과 전 세계 인류의 평화’에 기여함을 기치를 내걸었던 점이 눈길을 끄는데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홍구범을 문단에 등장시킨 문학잡지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1947년 《백민》에 <봄이 오면>을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1950년 8월 실종될 때까지 3년여 동안 단편소설 14편, 장편소설 1편, 콩트 4편, 수필 4편, 비평 1편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홍구범 씨의 <창고근처 사람들>, <서울길>, <귀거래> 3편은 모두 역작이다. 그 치밀한 객관묘사에 있어서나 대화의 리얼리티에 있어서나 주제의 심도에 있어서나 작가적 역량으로 의심받을 여지가 없다. 특히 <창고근처 사람들>에서 볼 수 있는 그 정확한 산문정신이……” ―1949년의 상반기 문단을 정리하는 김동리의 글 일부입니다.

홍구범은 광복 이후 좌익 쪽의 작가들이 대부분 월북한 상황에서, 문단의 우뚝한 봉우리였던 김동리가 발탁한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홍구범이 이기영, 김남천, 한설야의 소설을 뛰어넘는 산문정신을 구현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심지어 ‘장차 조선의 발자크가 될 것’이라고까지 할 정도였으니, 신세대 작가 홍구범에 대한 김동리의 신뢰를 짐작할 만합니다.

홍구범은 신인이면서도 발표 양으로나 또 작품성으로나 소설문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신예’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가였던 거죠. 홍구범은 이후 모윤숙의 발의로 이루어진 순수 문예잡지 《문예》의 창간 사업에도 적극 관여했고, 1949년 김동리 등이 전조선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를 해체하고 한국문학가협회를 결성할 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주덕읍 주덕양조장. 소설 <귀거래>의 배경이 된 양조장은 한때 홍구범이 일했던 현장으로 그 건물과 시설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국전쟁시 보안서원 체포돼 실종

그에 대한 연구가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긴 합니다만, 홍구범의 문학사적 의의는 무엇보다 순수문학을 표방하면서도 현실주의 정신을 놓치지 않은 점에 있습니다. 그의 소설에는 월남민의 궁핍이 잘 드러나 있으며, 이에 못지않게 작가 자신의 투영으로 보이는 지식인의 곤궁함과 자기성찰 또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문학 활동 한편으로 민주일보와 민중일보의 기자생활을 한 것이 현실에 날카로운 감각을 잃지 않도록 한 요소가 됐던 걸까요?

홍구범이 작품 활동 초기에 주로 사용했던 창작 기법은, 기대와는 정반대의 역설적인 상황 제시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해방공간’만큼 역설적인 공간도 없었을 터, 이러한 창작 방법은 광복 직후 희망을 가득 안고 조국으로 돌아왔던 귀환민들의 좌절감이나 지식인의 빈궁한 생활을 그려내는 데는 상당해 효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현실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는 데는 한계도 갖고 있었습니다.

<구일장>, <탄식>, <귀거래> 등의 작품을 통해 경제적 사정으로 인한 인간성 변모를 우려하면서 강한 윤리의식을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이토록 주목받던 홍구범은, 1950년 전쟁 발발 후 서울에 머물던 중 혜화동 로터리에서 보안서원에게 체포되어 자술서와 문학가동맹 가입원서를 쓰고 풀려났으나, 며칠 후 다시 체포된 후 종적이 묘연합니다.

이흡, 정호승, 홍구범, 한 고을 작가들을 ‘어디론가’ 데려가 버린 분단과 전쟁의 광기를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답답해집니다. 어느 저녁인가, 당신은 ‘웃프다’라는 요즘 시쳇말을 아느냐고 쓸쓸하게 물었었죠. 홍구범의 소설 중엔 그야말로 ‘웃기면서 슬픈’ 작품이 여럿입니다. 그 중에도 단연 압권인 <서울길>, 당신도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합니다.

홍구범이 태어난 신니면 원평리에서 음성 쪽으로 더 가다가 생극 못 미쳐 있는 무너미 마을, 이오덕(1925~2003)이 말년을 보낸 집 마당에 그의 시비가 있습니다. 이오덕은 경북 청송 사람입니다. 1954년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한 뒤,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와 수필이 당선되었는데요. 등단하기 이전에도 활발한 창작활동을 해 《별들의 합창》, 《탱자나무 울타리》와 같은 동시집을 펴냈습니다.

1983년에는 교사들을 모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고, 퇴임 후에는 우리말연구소를 만들어 글쓰기 교육운동과 우리말 연구에 힘썼습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써 오던 번역말투와 일본말투의 잔재를 걸러내고 우리말과 글을 다듬은 저서 《우리 문장 바로쓰기》와 《우리 글 바로쓰기》는 이 분야의 명저로 꼽힙니다. 교육자로서 어린이 글쓰기 이론을 세우고 널리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쳤거니와 모두 50권이 넘는 저서가 그 고요하면서도 격렬했던 생애를 말해줍니다.

▲ 대소원면 매현리 마을 앞에 삼탄 이승소 부조묘를 알리는 표석이 건립돼 있다. 비신에 그의 시 <제비>를 새겨 시비를 겸하였다.

‘금옥군자’ 이승소의 매현리 시비

다시 주덕읍 쪽으로 길을 돌려 수주팔봉 쪽으로 향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거운 마음으로 강산을 구경하자는 게 아니라 조금 돌아가더라도 이승소(1422~1484)의 한시 한 편 읽고 가자는 심산입니다. 이승소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서거정과 당대 쌍벽을 이룬 시인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러면서도 품행이 겸허하고 단아하여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금옥군자(金玉君子)라고 했다는 기록이 《성종실록》에 보입니다.

그의 부조묘가 있는 대소원면 매현리 앞 길가에 표석을 겸하여 시 <제비>를 새긴 시비가 섰습니다. “때론 나비 좇아 대숲을 뚫거니와/온종일 미나리꽝 진흙 쪼아다 둥지를 튼다/의탁할 곳 마련하니 뉘라 업신여기랴/해마다 새끼 쳐 나란히 날아간다”― 둥지를 마련하고 먹고사는 일과 자녀를 낳아 대를 잇는 일에 전념하는 제비의 일상을 무심히도 읊은 시를 읽으며 그 맹렬함에 감탄하는 한편 그 자족함에 부러움을 느낍니다.

한평생 인간사 또한 별다른 것이 없건만 어찌하여 예나 지금이나 편안할 날이 없느냐고 푸념을 늘어놓고 싶어집니다. 그 밑바닥엔 필시 빼앗는 자의 탐욕과 빼앗기는 자의 모멸감이 깔려 있을 텐데요, 그 천년 동안의 아귀다툼은 이념이 되어 어느 쪽이냐고 끊임없이 묻고 대답을 강요합니다. 어느 한쪽을 잘못 택하면 ‘종적도 없이’ 매장될지도 모르는 사회에 아직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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