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 탄생 100주년… 향토어로 빚은 시·문학정신 되새겨야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9)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정호승 시인. 21세 때의 모습이다.

<감자꽃>으로 운을 떼었으니 꽃 얘기를 더 할까요? 모밀꽃, 당신은 메밀꽃을 좋아하던가요? 일반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충주는 한편 ‘모밀꽃’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나는/들 가운데 외로이 선 허수아비/소슬바람에 풍겨오는/메밀꽃 향기를 사랑한다.”― 시집 《모밀꽃》의 서문 격인 글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던 정호승(1916~?, 본명 정영택)은 1916년 충주시 교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밀꽃이 지천이었던 충주 들녘 한가운데 허수아비처럼 창백하게 서서 민족의 얼굴과 수난을 보았습니다.

“어느 女人의/슬픈 넋이 실린 양/햇쪽이 웃고 쓸쓸한/메밀꽃//모밀꽃은/하이얀 꽃/그 女人의 마음인 양/깨끗이 피는 꽃//모밀꽃은/가난한 꽃/그 女人의 마음인 양/외로이 피는 꽃//(…)//세모진 주머니를 지어/까~만 주머니 가득/하이얀 비밀을 담어 놓고/아모 말없이 시드는 꽃”(정호승 <모밀꽃 1> 부분) 또 “올해같이/가무는 해는/들에 가-득/ 메밀꽃이 피여나//모밀꽃이/많이 피는 해는/마음이 가난하고/나라가 가난하고//올해같이/목마른 해는/젊은이 가슴 가득/메밀꽃이 피여나//(…)//몇 해만큼 한번씩/들에 가득/마음에 가득/모밀꽃이 피여나기 위하야//날은 가물고/목은 마른다”(<모밀꽃 2> 부분)라고 노래한 것처럼, 그는 메밀꽃이 갖는 보편적인 정서를 통해 식민지 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쓸쓸하고 깨끗하고 외롭고 가난하게, 메밀꽃이 피고 시드는 현상 속에서 긴 세월 동안 민족이 당하고 있는 궁핍과 굴욕을 환기시킴으로써 제국주의가 갖는 수탈과 침략의 모순성을 완곡하게 비판한 거죠.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향토어로 이루어진 그의 시집 《모밀꽃》에 담긴 시는 모두 34편에 불과하지만 개성적이며 수준 또한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식민치하 충주 농촌의 아름다운 원형과 일그러진 모습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에 건립된 ‘호승 정영택 시비’. 시 <모밀꽃 2>를 새겼다.

‘조선문학’ 발간 충북 문인 참여

1929년 충주 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정호승은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하지만 재학 중 좌경서적을 읽다가 정학과 무기정학을 네 차례나 당한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정호승의 장남 태준 씨가 부친의 생애를 정리한 글에 의하면, 이 무렵부터 이무영·이흡·지봉문(본명을 알 수 없어 신원이 분명치 않습니다) 등과 교유가 있었다고 합니다.(http://blog.naver.com/jtjunpoem /220268230535. 이하 일부 내용 인용)

1935년 왕십리로 이사하며 다시 서울로 올라간 정호승은 《조선문학》 발간에 참여합니다. 《조선문학》은 1933년 2월 이무영이 창간한 《문학타임스》를 그해 10월 제호를 바꿔 발행한 것인데, 당시 유일한 종합문예지로서 KAPF의 기관지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순수문학 작품도 게재하여 문단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또 앞서 거론한 충북 출신 문인들이 교류한 공간으로서도 의미가 큽니다.

정호승은 왕십리에 경충무역사라는 운수사업체를 여는 한편 건물 2층에 조선문학사를 차리고 문예지 발간에 필요한 재정을 도맡아 충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친일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이무영이 떠나고 나자 1936년 5월 2권 1호부터 《조선문학》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아 고군분투(?)하던 중에 부인 강릉 최씨의 사망을 계기로 회사를 정리하고 다시 낙향하고 말았습니다.

《조선문학》이 1937년 8월 휴간했다가 1939년 1월 속간 4권 1호부터 지봉문이 다시 편집·발행하게 된 속사정이라고 합니다. 태준 씨는 부친의 시 <모밀꽃 1>에 사별한 부인 최씨에 대한 애절한 마음이 배어 있다고 술회하기도 했는데, 사정을 알고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흑기로 접어들 무렵인 1939년 정호승은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인 《모밀꽃》을 펴냈습니다. 시집에는 당대의 농촌 현실이 녹아 있었고 생생한 향토어가 빛나고 있었죠. 일본어를 국어로 쓰던 식민치하에서 우리말을 공들여 시어로 빚어낸 정호승의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값진 것이라 할 만합니다. 정호승은 자신의 고향 충주를 ‘성가시게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합니다. 그 무거운 슬픔은 고향이 더 이상 조화와 화해의 공간이 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비극적 서정은 “아름다운 것들은 비극들을 지녔구나”(<憂鬱>)라는 시구에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비극을 보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세계 인식은 정호승이 스스로 ‘창백한 지식’이라고 명명한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그 한숨과 한탄과 우울은, 참혹한 현실을 보고서도 선뜻 앞장설 수 없었던 ‘행동 부재’에 대한 자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신의실 마을 표지석. 이흡의 시 <신의실>를 새겨놓은 점이 특이하다. 1937년 5월 《조선문학》에 발표된 <신의실>은 1936년 9월 《신동아》에 발표된 <고향의 노래>와 같은 작품이다.

일제 순우리말 시집 ‘모밀꽃’

시집 발간 이후 줄곧 일제의 사찰 대상이 된 정호승은 고등계 형사들이 집안을 드나들자 갖고 있던 서적과 시 원고들을 불태워야만 했습니다. 1945년 광복 당시 정호승은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확실한 면모를 보입니다. ‘아름다움 속의 비극’에 붙들려 있던 시들은 후기로 가면서 점차 낙관적이고 건강한 민중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남로당에 입당하고 정치적 색채가 짙은 동인지 《我友聲》을 발간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한 것도 이 무렵이죠.

이 활동으로 1946년 청주교도소에서 6개월 간 복역한 그는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입북하는 김구를 따라 북행했다가 또 다시 복역하였습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충주지역 예술동맹위원장을 지냈던 정호승은 그해 추석 월북했고, 이후의 삶은 자취를 알 수 없습니다.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월북한 많은 작가들이 문단의 관심을 받은 것에 비교하자면 정호승은 그렇지 못한 경우에 속합니다. 우리의 무관심은 여전히 그를 문학사의 변두리에 남겨놓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이흡의 경우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위로해야 할까요? 신니면 신청리 490번지 신의실 마을에서 태어난 이흡(1908~?)은 1930년대 초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동반자문학파의 일원으로 출발하여 일관되게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던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현실주의적 성격이 강하여 농촌의 궁핍상과 자본주의적 도시 문명의 황폐함을 고발하는 데 고양된 어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나 고백하는 말이지만, 역시 삶의 마지막을 알 수 없는 그의 시 한 구절 읽는 것으로 할 일을 마쳐야 하는 마음이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信義室은 고요한 마을/信義室은 나의 젓엄마//꿈엔들 잊으랴 아쉽고 보곱하라/동무야! 山川아!//앞 개울에 아가시아 꽃피고/뒷동산에 솟족새 울고//國望山 같은 큰맘에 안겨/아츰이면 해뜨자 들로 나아가고//迦葉山 같은 열정에 잠겨/져녁이면 내일을 마련하고//(…)//내 故鄕 信義室은 아름답고/내 故鄕 信義室은 平和하였나니//어이다 나는/他關에 뒹구는고/보고지고 十年이 아쉬워라”(이흡 시 <故鄕의 노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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