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제협력단 일원, 인도네시아 반자르마신市 고교 한국어교사 봉직
1년째 한류전도사 활동, 무더위와 외로움 속 ‘도량(道場)’에서 사는 삶

안남영의 赤道일기

본 연재는 적도국 인도네시아에 2년 임기의 자원봉사자로 나가 있는 안남영(安南榮·57) 전 충북방송 대표가 전하는 현지 체험기다. 안 대표는 지난해 10월5일 사단법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해외봉사단의 일원으로 파견돼, 현재 깔리만딴 섬 반자르마신市의 한 기술학교에서 한국어교원으로 일한다. 낯선 환경에서 홀로 자취하며, 한국어와 한류의 전도사로서 겪는 그의 업무와 일상,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옆모습을 엿본다.

“남편 발목을 이런 식으로 잡나?” (꽝-문닫는 소리)

2015년 6월24일 밤. 나는 아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내 방에 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결심한 건데, 결국 포기해야 하는 건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해외에 파견하는 봉사단원 모집에 지원했던 나는 ‘배우자 동의서’를 불쑥 내밀었다가 불의의 퇴짜를 맞았다. 막연히 “외국에서 한국어 봉사 좀 하고 싶다”고만 말했지, 변변한 상의를 생략했던 나로선 당연한 업보였다. 뜬금없이 날인 요구를 받은 아내도 그랬겠지만, 자못 당혹스러웠다. 4월말 원서를 내서 서류심사, 면접, 신용조회, 신원조사, 신체검사 등을 거쳐 최종 합격까지 2달이상 걸렸다. 그런데 소정의 국내 교육 입소를 앞두고 구비서류 중 배우자(부모)동의서라는 암초를 만난 것이다. 이게 제출 안 되면 모든 게 허사다.

30분쯤 흘렀을까―. 아내의 불만을 이해 못할 바 아닌지라 모종의 좌절감에 머리가 아파올 무렵, 방문이 열리더니 아내가 과일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손에는 도장까지 쥐여 있었다.

“어디 좀 봐요.”

좀 전의 불만 가득한 말투와 사뭇 다른, 차분하게 반전된 목소리가 나를 또 한 번 당황시켰다. 동의서가 건네지자 아내는 자기 이름을 적고는 도장을 꾸욱 눌러 찍었다. 언제, 어디로 가서 얼마나 오래 있는지 등등 이것저것 질문이 쏟아졌고 나의 퉁명하던 대답은 이내 사근사근해졌다. 당시 내가 희망해 배정된 국가는 튀니지였다. 파견 기관이 미정이었지만 3개 대학교 후보들은 알 수 있어서 함께 구글지도로 검색하며 미답의 세계를 가늠해 봤다.

배우자 동의서 받기 부터 암초(?)

예정대로라면 아프리카 튀니지의 어느 도시에 있었겠지만 지금 나는 적도국 인도네시아 깔리만딴(Kalimantan)에 있다. 세계 3위의 칼리만탄은 우리에게는 ‘보르네오’라고 잘 알려진 섬으로, 적도가 가로지르고 있다. 그 남쪽 끝의 반자르마신(Banjarmasin)이 내가 살고 있는 도시다. 남부 깔리만딴 지방의 주도로, 청주보다 약간 작은 인구 60만 명의 도농 복합도시다. 인도네시아 내 ‘3대 이슬람도시’의 하나라고 한다. 그만큼 이슬람 색채가 강한 곳이다.

이제 인도네시아에 온 지 만 1년. 낯선 환경에 익숙해질 법도 한 시점이지만 여전히 인도네시아는 심적 도전을 각오해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무엇보다 사람과 언어, 문화와 자연환경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지만 그 중 더위를 연중, 아니 밤낮 겪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국내 교육 입소 직전 튀니지에 테러가 나는 바람에 갑자기 파견국이 바뀌었는데, 그래도 추운 몽고나 키르키즈스탄 같은 곳에 떨어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지낸다.

이곳에는 작년 12월1일 왔다. 10월5일 출국했으니 8주 만이다. 그간 자카르타의 코이카 인도네시아 사무소 주관의 현지 적응 교육을 받았다. 어학교육 위주에 안전교육, 역사 문화 교육이 맛보기로 진행됐다. 다들 그렇듯이 나도 말문이 제대로 트이지 않은 상태에서 부임했다. 근무처는 우리로 치면 전문계고교 같은 곳이다. 학생들에게 제2외국어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게 내 임무다.

▲ 반자르마신 시내 전경.

나를 위한 주문 “싸바르,싸바르!”

한국어에 관한 한 누구보다 자신 있어 선택한 길이지만 현지에서의 미션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지 언어가 서툴기 때문. 인도네시아말에 능통하다면 한글을 좀더 쉽고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덜어 내기가 쉽지 않다. 난제 중의 난제가 단어 암기다 보니 현지어가 좀처럼 늘지 않는 거다.

게다가 교육 환경과 학교 행정에 대한 어긋난 기대감이 수시로 인내심을 시험당하는듯한 기분을 강요당한다.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수행 중’임을 환기시키며 속으로 “싸바르,싸바르!”라고 외친다. 이는 “참고 참아라”라는 뜻으로 ‘득도한’ 선임단원이나 교포들이 들려준 주문(呪文)이다. 이 말은 야속한 날씨나 모기의 공격에도 효험이 있어, 신기하게도 짜증이 반감된다.

지난 5일 출근해보니 편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뜯어보니 1년 전 국내 교육 과정에서 내가 나한테 쓴 편지다. 정말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당시 가장 먼저 후다닥 쓰고 나왔던 기억이 났다. “忍 忍 忍, This will pass away. 초심으로 돌아가 여전히 (봉사활동으로) 가슴이 뛰는지, 보람을 쌓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힘내야지. 누군가 묻거든 뭐라고 답해야 할지를 준비하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내일도 겸허하게 맞아야지.”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적극적·건설적 힐링’위한 선택

돌이켜 보건대 나의 지난 인도네시아 생활 1년은 답답하지만 행복한, 외롭지만 보람있는 세월이었다. 특히 모르는 사람들조차 마주치면 이방인임을 알아보고 거의 눈인사를 하는데, ‘국가대표’로서 자부하는 한편 조신하게 된다. 학생들의 해맑은 인사를 받으면 시쳇말로 ‘국뽕’을 맞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숙젯거리를 쌓아 두고 달려온 시간임을 부인 못하겠다. 목표의식, 사명의식, 교수능력 등에 다부짐이나 진지함, 자질 면에서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 들때가 많다. 인생의 전환점을 멋지게 찍어 보자는 다짐이 아직 여물지 못한 느낌이랄까.

출국 전 주위로부터 인도네시아행 이유에 대한 물음을 숱하게 들었지만, 나의 대답은 늘 정제되지 않았고 그때그때 달랐다. 꼽아 보니 20가지도 넘는다. 이쯤되면 ‘신의 한 수’급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걸 간추리면 크게 다섯 가지다. 첫째 삶의 변화, 둘째 가족애의 재발견, 셋째 애국심의 재충전, 넷째 한국어강의 경험 축적, 다섯째 내 시간 확보가 그것. 인생 관조, 음지 체험, 국가관 재확립 거창한 말로 풀어낼 수도 있겠지만, 한마디로 ‘적극적·건설적 힐링’이다.

해외봉사 떠난다니 격려하거나 심지어 부러워했던 사람들이 주위에 많았다. 그들의 기대와 나의 소망이 헛되지 않도록 늘 ‘지금’의 무게와 도야를 생각한다. 거대한 ‘도량(道場)’에서 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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