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SNS에서 해시태그가 이렇게 활용된다는 것이 참으로 기발하다. 시대를 거스르며 악착같이 아날로그에 집착하던 이들도 이것만큼은 깨끗이 인정해야 할 판이다. 언론에선 어느덧 잊혀지는가 싶던 최순실이 누리꾼들의 손안에선 오히려 더 큰 노리개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최순실 해시태그는 묘하게도 이 단어의 본질에 너무도 충실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고기를 잘게 썰고 다진다는 의미의 영어 해시(hash)가 언론으로 전이되면 ‘아는 사실의 재탕’ 쯤으로 해석된다. 결국 누리꾼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 ‘최순실’을 자꾸 재탕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 안달이다. 아니 최순실을 숨기려는 세력에 맞서 반대로 절대 잊지 말 것을 압박하는 것이다. 이것만 보면 언뜻 40여년전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떠오른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의 중도 하차를 부른 이 사건은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라는 두 기자가 없었다면 당연히 묻혔다. 온갖 위협과 위험을 무릅쓰고 둘은 마치 특공작전이라도 하듯 이 사건을 물고 늘어지며 기사를 쏟아냈다.

당시 정부기관은 물론이고 수사를 맡은 FBI까지 닉슨의 도청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숨기려 했고, 결국 이들 기자가 꺼내든 카드는 다름아닌 ‘아는 사실의 재탕’이었다. 현장을 찾아 잠입취재를 하고 사건을 재구성하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일깨웠다.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자 닉슨은 CIA를 내세워 FBI의 조사를 방해했지만 허사였다. 이미 두 기자를 통해 미국인들은 ‘재탕된 사실’을 진정한 사실로 인정하게 됐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언론사 기자가 아닌 누리꾼들이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을 대신하고 있다. 미르와 K스포츠 재단이 문제가 되면서 여론의 칼이 최순실과 권력의 핵심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난데없는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이정현은 국민들의 비웃음도 아랑곳않고 단식을 벌였고, 별로 잘 생기지도 못한 김제동은 졸지에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이러는 사이 언론에선 최순실이 저만치 물러나는가 싶었지만 난데없이 해시태그가 그녀를 다시 여론의 중심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거짓의 확산은 사실보다도 빠르다. 하지만 사실의 은폐는 더 많은 거짓을 수반한다. 지금 최순실이 그렇다. 사실을 숨기려는 사람과 그 세력들이 많아질수록 최순실은 지금보다도 훨씬 강한, 그리고 더 정교한 거짓으로 포장돼 앞으로도 계속 해시태그를 달고 떠돌 것이다.

언론이 힘을 잃었다. 아니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는 것이다. 4부의 권력으로 통하며 적당히 타협하는 관행과 관습의 단맛에 취했던 언론은 이제 김영란법이라는 암초까지 만나 더 더욱 기력을 잃게 됐다. 이럴 때 나타난 최순실 해시태그는 눈을 번쩍 뜨게 한다.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이 이를 대체할 모종의 대안언론을 급격하게 키울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미 1인 SNS언론이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있다. 최순실 해시태그가 그 증거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무조건 썩는다.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런데 멀리 필리핀에서 날아온 소식이 또 이 명제를 사정없이 휘갈긴다. 마약사범에 대한 현장 사살로 무려 90%대의 국민지지도를 받는 두테르테가 자신의 선거공약이었던 ‘부패한 언론인은 합법적인 암살대상’을 실천할 조짐이다. 그러잖아도 필리핀에선 부정부패를 취재하다가 암살되는 기자가 속출하고 있다.

문제는 두테르테가 말하는 부패한 언론인의 기준이 뭐냐는 것이다. 그는 얼마전 오바마와의 정상회담이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욕설 파문으로 무산되자 뒤늦게 화살을 언론으로 돌렸다. 자신이 오바마를 욕했다는 것은 언론의 오역과 오보이지 사실이 아니라면서 언론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표출했다.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언론인은 처형에 있어 예외가 아니다.” 우리로선 소름이 돋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국민에 의해 합리적인 지도자로 꼽힌다. 나라를 말아먹기 일보 직전의 마약사범에 대한 즉결처분은 되레 대다수 국민들의 호의를 산다. 워낙 골치덩이였기 때문이다. 언론에 대해서도 처음 그의 입장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도 다른 사람에 대한 명예훼손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로 아주 부드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처형과 암살로 돌변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분명하다. 부패한 언론과 명예훼손의 판단잣대가 자신과 권력에 대한 어깃장으로 귀결되지는 않을까 하는 최근의 분위기인 것이다. 이는 언론에 대한 막말과 불편한 심기의 표출이 점차 노골화된다는 데 기인한다. 똑같은 고민을 미르-K스포츠 재단과 최순실을 놓고 한번 해 본다. 한창 진행되고 있는 국감에서도 확인됐지만 이들 문제만 건드렸다 하면 곧바로 반 국가세력이 되고 심지어 이적행위로까지 몰린다.

어차피 언론은 권력에 늘 불편하다. 견제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썩어문드러지는 권력이지만 그 권력은 절대적으로 양보나 배려가 없는 오로지 독점만을 추구하기에 누가 덤비는 것 자체를 증오한다. 때문에 두테르테가 앞으로 공개처형을 일삼는 김정은이 될 것인지, 아니면 나라를 근본적으로 개혁한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될 것인지는 조만간 드러난다. 결국 관건은 언론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정의사회를 부르짖으며 언론을 학살한 전두환은 결국 백담사로 유폐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만약 그때 ‘전두환 해시태그’가 가능했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적어도 돈은 덜 먹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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