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생거진천문화축제 계기 재평가·다양한 활동 본격시동
특사 이미지 넘어 건국의 민족교육자, 근대 수학 선구자 등 부각

▲ 이상설

보재 이상설 선생에 대한 재조명 사업이 본격화됐다. 지난 7일부터 3일간 생거진천문화축제를 대대적으로 개최한 진천군은 이 기간동안 이상설 부스를 별도로 설치, 내방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진천군은 사단법인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석형)와 함께 지금까지 추진된 기념사업에 대한 주민이해를 새롭게 하는 한편 향후 과제를 ‘이상설 재평가’로 설정해 다각적인 활동을 펴기로 했다. 재평가는 내년으로 다가오는 이상설 순국 100주년에 맞춘 최대 현안으로, 이 사업의 성과 여부에 따라 앞으로 생거진천으로 상징되는 지역의 이미지와 정체성은 크게 달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70년대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된 기념사업에도 불구, 지금까지도 이상설에 대한 국민인식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다 좌절한 후 망명지에서 숨진 독립운동가’에 머물러 있다. 그저 밀사(密使) 내지 특사(特使) 차원으로만 부각돼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상설의 실체와는 크게 어긋나는 접근으로 그동안 국내 사학계와 언론을 중심으로 이같은 역사서술의 오류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기됐으나 ‘이상설 재평가’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진천군과 이상설기념사업회는 순국 100주년을 맞아 내년 초 88여억원이 투입되는 이상설 기념관 착공까지 계획됨에 따라 재평가 내지 재조명의 방점을 찍겠다는 의지로 현재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 최재형

그동안 학계에서 문헌 등을 통해 확인한 이상설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고종황제의 특사가 아닌 항일운동의 한 사조를 정립한 우리나라 건국의 대부쯤으로 인식될 정도로 그 활동폭이 가히 전방위적이자 주도적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일찌감치 동양평화론을 외친 뛰어난 외교가이기도 했다. 이상설은 그 때 이미 극동의 영구평화를 위한 한국의 영세중립을 주창해 요즘도 잊을만 하면 터져 나오는 ‘동양평화론’의 원조가 되고 있다. 1914년엔 연해주를 근거로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해 초대 정통령(正統領)을 맡아 국권회복을 꾀했다.

정작 이상설은 독립운동이나 외교, 정치보다는 교육과 학문에서 당시로선 파천황이랄 수 있는 독보적인 경지를 쌓은 것으로 최근 학자들에 의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7세의 나이에 당시 조선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교수이자 초대 관장까지 지낸 이상설은 근대 신학문을 국내로 들여온 선각자이자 국제정치와 법률을 전공한 탁월한 이론가였다. 여기에다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 북만주에 ‘대전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을 향해 앞으로 대한민국 독립쟁취를 위한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함으로써 누구보다도 앞선 민족교육의 창시자로도 꼽힌다.

▲ 최재형 기념관 모금운동 현장.

특히 학자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수학분야에서 두드러져 현재 이에 대한 재평가 또한 속도를 내고 있다. 그가 1899년 완성한 수학서 ‘수리(數理)’는 학계에서 우리나라 근대 수학의 효시라고 받아들일 정도다. 여기엔 오늘날의 삼각함수 공식은 물론이고 피타고라스 정리와 2차방정식까지 등장한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근대수학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했다는 게 정설이었는데 ‘수리’의 발견으로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생적으로 수학을 연구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엔 그 어떤 조선의 수학서에도 나오지 않은 현대적 기호와 부호들이 등장했는가 하면 일본 수학을 원용한 기존의 수학책들과도 분명히 달랐던 것이다. 지역에서 수학전문가로 통하는 이종석씨(청주 교연학원장)는 “당시 이상설이 설파한 수학이론은 지금 시각으로 봐도 놀라울 정도로 적확하다. 아무리 그 시절에 신학문을 접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의 수학서를 냈다는 자체는 천재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수학에 대한 이상설의 천재성은 지난해 KBS가 광복 70주년 특집 방송을 통해 집중 조명하면서 ‘수리’라는 책까지 처음 공개함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상설은 수학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실증적 학문에 남다른 선견지명을 보이며 저술까지 관철시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물리학 책인 백승호초(百勝胡艸)를 비롯해 화학 책 화학계몽초(化學啓蒙抄) 식물학 책 식물학(植物學) 등이다.

이처럼 이상설의 업적이 사후 100년이 되도록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이상설기념사업회는 대략 두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말살됐다는 것으로, 이상설은 죽음을 앞두고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내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함으로써 실제로 그의 항일운동 동지들은 유품 대부분을 불태웠는가 하면 시신도 화장해 그의 유허비가 있는 연해주 우스리스크의 솔빈강(率貧江)에 뿌렸다.

두번째는 이상설이 명리(名利)를 뒤로 한채 오로지 위국위민의 봉사로만 일관하며 공훈을 남에게 돌리는 바람에 사후는 물론 생전에도 그의 활동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선 러시아 연해주 현지에 가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이곳에서의 모든 활동은 거의 이상설과 함께 또다른 걸출한 독립운동가 최재형으로 집약된다. 둘은 늘 앞장서 움직였지만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를 조직화해 뒷받침하는데 뜻을 같이 했다. 시쳇말로 마당을 깔아주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다.

그 결과가 이상설의 축소평가를 불렀고 최재형 역시 우리나라 역사책은 물론이고 현지에서조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최재형에 대한 재평가는 최근에야 불붙기 시작해 현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을 중심으로 최재형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이 펼쳐지는 중이다.<사진> 진천에선 이상설 기념관, 블라디보스토크에선 최재형 기념관이 추진되는 셈이다.

▲ 생거진천문화축제 현장에서 이연우 이상설기념사업회 부위원장. / 육성준 기자 eyeman@cbinews.co.kr

이상설 재평가에 대해 사단법인 이상설기념사업회 이연우 부위원장(공주대학교 교수·사진)은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한다. “이상설 선생이 잘못 알려진 게 아니라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특사라는 화석화된 인물이 아닌 이상설의 실체를 찾아야 한다. 숨겨진 업적을 추적하다 보면 과연 그가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또 어떤 헌신을 다했는지 모든 게 새롭게 드러날 것이다. 순국 100년의 궁극적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지금까지도 훌륭히 잘해 주셨지만 앞으로의 재평가 사업에도 진천군의 지원과 협조가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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