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김희찬씨‘일영석’ 가능성 제기, 고려시대 제작 추정

▲ 충주시 지현동 대원사 극락전의 보물 98호 ‘충주 철조여래좌상’의 좌대(座臺)가 충주에서 가장 오래된 해시계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 왼쪽은 현 철조여래좌상과 좌대, 오른쪽은 1915년 발간된 ‘최근지충주’에 실린 철조여래좌상과 좌대.

충주시 지현동 대원사 극락전의 보물 98호 ‘충주 철조여래좌상’의 좌대(座臺)가 충주에서 가장 오래된 해시계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또 해시계가 갖는 유물로서의 가치 판단을 위해 제대로 된 확인절차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비영리단체 ‘아이들의 하늘’ 주비위원회 간사이며 향토사학자인 김희찬씨는 “대원사 철조여래좌상을 받치는 좌대는 김상현 씨가 1959년 ‘충주시지’의 원형이랄 수 있는 ‘예성춘추’를 발간하면서 언급한 ‘일영석(日影石)’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일영석은 ‘해 그림자가 비치는 돌’로 해시계를 가리킨다. 이 좌대는 그동안 탑재 등으로 인식돼 주목받지 못했지만, 김씨는 1915년 발간된 ‘최근지(最近之)충주’에 실린 철조여래좌상과 좌대의 사진을 근거로 현재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좌대가 일영석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최근지충주’에 실린 사진을 보면 당시 철조여래좌상과 좌대가 홍법국사 실상탑과 함께 현 관아공원 내에 있던 충주군청 뜰에 옮겨져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예성춘추에는 ‘현 성남동 마하사 전정(前庭)에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어림이에 고도(古都)를 정하고 일영(日影)을 보기 위해 이 일영석을 일영대(日影臺)로 창조 설치했던 바…’로 적혀 있다.

유물가치 확인절차 필요

문헌기록을 보면 일영석은 안림동 어림리의 고도에서 1869년(고종 6년) 충주 읍성 개축 후 성서동 희락목욕탕 자리로 옮겨졌고, 1913년 충주 시구(市區) 개정 때 2로터리 보성한의원 뒤쪽 마하사(당시 본원사)로, 1959년 이후 대원사로 이전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 이 일영석은 그 기능에 관계없이 1922년에 안림동 염바다에 있던 광불(狂佛)로 불리던 철불을 현재 충주교육지원청이 있는 당시의 상연당 천운정 석가산에 옮겼다가 1937년에 마하사로 옮겨졌는데 이때 철불의 좌대로 사용됐다.

‘예성춘추’의 기록을 기준으로 한다면 좌대는 충주에서 유일하게 확인되는 고대의 해시계가 될 것이라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아울러 대원고교 운동장에서 발견된 의림사지 청동반자(1190년 고려 명종 20년 제작)나 안림동 538일원 과수원 부지의 절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거대한 대좌 등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 볼 이유가 있다고 했다.

대원사 철불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98호로 지정됐다. 해시계의 발전 단계상에서 자체가 가지는 유물로서의 가치가 따로 연구돼야 하지만, 좌대가 보물로 지정된 철불의 부속물이기에 현재로서는 확인절차가 간단치 않다. 김씨는 “관계법령에 대한 검토와 그것의 확인 작업을 위한 절차 등을 충주시를 중심으로 준비해야 한다”며 “현재 대원사 철불의 경우 보물로 지정돼 있음에도 접근성이 좋지 않아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대원사 철불의 좌대로 인식돼 온 그것이 충주의 가장 오래된 해시계라는 기록은 일찍부터 있었지만, 눈여겨보지 않았던 관계로 주목받지 못했다”면서 “다행히 철불의 좌대로 짝을 이루어 100여 년을 함께 옮겨 다녔기에 보존되고 있었고, 지금이라도 주목해 살펴볼 계기가 마련된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또 “충주의 해시계에 대한 확인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철불과 함께 도심 관광코스의 일원으로 개발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길경택 충주박물관 학예연구팀장은 “예성춘추에서 언급한 전설상 삼한시대 제작보다 인근 의림사지와 연관지어 볼 수 있다면 고려시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대원사는 충주 진영과 관계 깊어

한편 철조여래좌상이 있는 대원사는 충주 진영(鎭營)과 관련이 깊다. 지방에서 국방과 치안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던 진영은 1895년 을미개혁에 의해 폐지됐고, 충주진영도 이때 사라졌다. 민비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한 제천의병이 충주읍성을 쉽사리 점령한 것도 진영의 폐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898년 9월 관아 서기청에 경찰서가 들어오는 것을 기점으로 읍성 내에 일본인 세력의 지속적인 침투가 이뤄지면서 조선시대 관아시설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위한 공간으로 점차 변질됐다. 진영청사는 1905년 11월부터 일본군 수비대의 점거가 시작됐다. 충주주둔 일본군은 1923년 3월 31일 충주에서 철수했는데, 일본군이 떠난 이후 사용하던 수비대 건물을 조사한 일제는 건물의 일부 건축자재가 사찰에서 사용했던 것이며, 창룡사와 인근 사찰을 철거해 진영청사를 건축한 사실을 알게 됐다.

사찰에서 사용하던 건축자재라는 사실에 두려움과 부담을 느낀 일제는 남산 창룡사의 주지 추월스님에게 건물의 자재를 철거해 갈 것을 요청했다. 건축자재를 깊은 산속 남산 창룡사로 옮겨가는 것이 수월치 않아서 보은 법주사와 지역사회의 협력을 얻어 그 자재로 1929년 사직산에 충북포교당을 창건했다. 이후 이 포교당은 대원사로 사찰명을 변경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