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생거진천 문화축제가 7일부터 3일간 열린다. 진천군은 도내 자치단체 중에서도 자체 축제에 대한 SNS 홍보가 유독 돋보인다. 행사 일정에 대한 동영상 제작이나 주변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노력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축제는 최근들어 각종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역동성을 보이고 있는 진천군을 한 눈에 조명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축제의 여러 아이템 중에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보재 이상설에 대한 기념사업이다. 진천군은 이번 축제를 통해 이상설을 좀더 실체적으로 기리겠다는 의지를 초장부터 밝혔다. 내년으로 계획된 이상설 순국 100주년 사업을 앞두고 일종의 예비고사를 치르겠다는 취지에서다. 이미 4개 전담팀으로 짜여진 실무협의회가 구성돼 가동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상설에 대한 기념사업은 이미 오래전부터 추진돼 왔다. 1971년엔 숭모비, 1975년엔 숭렬사라는 사당을 건립했고, 해마다 이곳에서 추모식을 열고 있다. 내년 초에는 이상설기념관 착공도 앞두고 있다. 선생의 생가(충북도 기념물 77호) 주변에 87억7000만원을 들여 대대적인 기념관을 세우는, 한 마디로 추모사업의 방점을 찍는 사업이다.

이처럼 진천군에서 벌어지는 각종 기념사업의 외양은 크게 나무랄게 없다. 오히려 요즘 전국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특정 인물에 대한 지나친 작위적 해석이나 과대포장을 우려할 법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상설 기념사업은 그 정반대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상설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접근이 너무 왜소하다는 걸 우선 지적하고 싶다.

그동안 일반인들이 역사책에서 배운 이상설은 여전히 ‘밀사(密使)’ 내지 ‘특사(特使)’에 머물러 있다. 그가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다 실패한 후 망명지에서 서럽게 병사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상설을 이의 프레임에 가두는 것은 그 인물 됨됨이의 사실관계에 비춰볼 때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상설은 단순히 조선황제의 특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잃었던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우리나라 건국의 최고 주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너무도 지난했고 또 치열했다. 이상설의 건국운동은 1910년 쯤부터 조직화됐다. 그해 항일운동의 근거지인 러시아 연해주에서 의병부대인 13도의군이 창설됐는데 목표는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해 일제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 때 이상설은 동지인 유인석 이범윤 등과 합세해 한일합병의 무효를 선언하는 ‘성명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에 앞장선다.

1911년엔 독립군 양성과 정부수립이 목표인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해 활동하면서 북만주에는 ‘대전학교’라는 사관학교까지 세워 본격적으로 국가회복을 모색하게 된다. 권업회는 3년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광복군정부로 개편돼 명실상부한 망명정부 체제를 갖추게 된다. 대한광복군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다름아닌 이상설이었다.

이후 1918년 일제가 시베리아 침공을 감행하자 대한광복군정부 주축세력들은 다음해 2월 국내외를 통틀어 실제적인 최초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해 일본에 맞서게 됐고 약 6개월 후엔 발전적 해체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와 합병하게 된다.

이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이상설은 최근 국가적 담론이 되고 있는 건국절 논란의 1차적 요체인 상해임시정부 수립(1919년 4월 13일)보다도 훨씬 앞서 우리나라 건국을 주도한, 한민족으로선 가히 영웅같은 존재인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진천군의 이상설 기념사업은 특사로서의 이미지보다는 바로 이 점에 천착해야 본질을 꿰뚫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래야 진천군은 우리나라 국토의 중심이자 최고로 살기좋은 생거진천이라는 정체성을 더 확고히 할 수 있다.

이상설 기념사업의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 국내에만 치중됐다는 사실로, 이제부터는 그가 실제 활동한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하는 연해주로 시각을 넓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의 항일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념사업은 한-러시아 간의 특수관계로 여전히 그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만 그렇더라도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연해주 우스리스크에 있는 이상설 유허지만 봐도 그렇다. 마침 도내 충일관광여행이 올해 첫 시행하는 기획사업인 연해주 역사기행에 참가해 지난 주 이 곳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비포장 도로 옆에 소규모로 덩그러니 조성된 것도 안타까운데 지금은 지난해와 올해 연이은 홍수 피해로 주변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유허지 주변에 식재된 소나무조차 듬성듬성 고사되는 바람에 분위기는 더 황량하다.

이상설은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함으로써 그의 화장된 유해는 유허지에 바로 붙어있는 솔빈강(率賓江)이라는 강에 뿌려졌다. 이 강은 흘러흘러 동해에 이르는 것을 보면 이상설은 죽어서까지 조국을 향한 독립의 의지를 곧추세우려 했던 것같다.

그런데 유허지의 안내판은 손으로 흔들면 금방이라도 뽑힐 것같은 시골동네 수준이고 그나마 솔빈강엔 안내판조차도 없다. 탁하디 탁한 강물이 마치 아직도 이곳 물속을 헤매는 이상설의 서러운 혼을 암시하는 것같아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진천군 사람들이 이 곳으로 가서 무슨 대안이라도 고민하라는 것이다. 적어도 이역만리에서 온몸으로 삭풍을 맞으며 나라를 되찾으려다 47세의 한창 나이에 끝내 순절한 ‘충북의 영웅’을 이런 식으로 대접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귀국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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