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응·홍구범·정호승·이흡 등 걸출한 작가 배출… 자치단체 관심은 ‘제로’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7)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충주는 남한강가의 고을입니다. 단양·제천을 지나 서진하던 남한강이 충주 한복판에서 방향을 틀어 북서쪽으로 나아갑니다. 큰물을 끼고 큰 고을이 번성하게 마련이고, 고을이 크면 인물도 많이 나게 마련인가요? 빼어난 시인·작가를 많이 낸 땅으로 들어가는 마음이 급하기만 합니다.

마한의 영역이었던 충주는 백제가 개척한 땅이었습니다. 고구려에 속해서는 국원성이라 하였으나 신라가 빼앗은 다음 진흥왕 때는 소경(小京)을 설치했고 경덕왕 때에 중원경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는 충주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이며, 글자가 마모되어 정확한 해독은 어렵지만 장수왕 대에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정계비 성격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남한강과 달천의 합수지점인 탄금대.

충주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얻은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관찰사를 두었거니와,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충청’이란 말이 생겨났을 만큼 충주는 충청도의 으뜸 도시였습니다. 1908년(순종 2) 경부선에서 벗어나 있어 교통이 불편하다 하여 도청을 청주로 이전하면서 청주와 운명을 바꾸어 충주군이 되었습니다. 1956년 충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중원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5년 도·농 통합정책에 따라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남한강서 가장 번성한 목계장터

속리산 비로봉 서쪽 계곡에서 시작하여 괴산을 거쳐 온 달천은 탄금대 아래에서 남한강 본류에 들어갑니다. 달천은 옛날 이 강에 수달이 많이 살아서 생겨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달천 부근에 수달피 고개도 있고 수달을 조정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럴 듯하지만, 역시 물맛이 달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에 애착이 갑니다. 임진왜란 때 파병되었던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건너다가 물맛을 보고는 중국 여산(廬山)의 수렴(水簾)과 같다고 했다는 말도 있고, 조선시대 이행이라는 이는 “충주 달천의 물이 천하에 으뜸가는 물맛이고 한강의 우통수(牛筒水)가 둘째이며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가 셋째”라며 우리나라 물맛의 품격을 매겼다는 말까지 곁들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그러한 달천을 상수원으로 쓰고 있으니 충주 시민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라 해야 할까 봅니다.

▲ 남한강의 나루 중에서도 가장 번성했던 목계나루.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나루>를 새긴 시비가 있다.

탄금대에서 달천을 받아들인 남한강은 흘러 서울로 향합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한강 상류에서 물길로 오가기에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가 살 곳으로 많이 정했다”고 한 것처럼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충주는 우리나라 최대의 교통 중심지였습니다. 기차나 자동차 따위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남 사람들이 백두대간을 넘어 서울로 가는 길은 세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죽령을 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령을 넘는 것입니다. 고갯길의 원조를 따지자면 충주와 문경을 잇는 하늘재(계립령)가 처음이지만 조령이 열린 이후 잊힌 길이 되고 말았죠.

또 하나는 추풍령을 넘어 보은을 거쳐 청주를 지나는 길입니다. 그러나 어느 고개를 넘든 길은 충주로 통했고, 대개 충주에서 배를 타고 길을 이었습니다. 가금면 가흥리에 조선시대 때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창고인 가흥창이 설치되었던 배경도 그런 것입니다. ‘창(倉)’이란 세금을 한데 모으는 중심지가 되는 곳을 일컫는데, 이곳 가흥은 충청도 북부와 경상도 여러 고을에서 현물세로 거두어들인 세곡들을 모아 서울로 싣고 가던 항구였습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로 시작하는,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 기억하나요? 남한강의 수많은 나루터 중에서도 가장 번잡했던 곳이 바로 ‘목계’였다죠. 《택리지》에도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적었을 만큼 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 왁자했다고 합니다.

목계에서 20리 상간인 노은면에서 태어난 신경림 시인도 어린 시절에 들었던 기억을 회상한 바 있거니와 그 시절 이 지역 사람들에게 목계는 ‘한번 가보고 싶은 꿈의 대처’였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어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끊어지면서 가흥창은 물론 목계 나루도 쇠퇴의 길을 걸었고 지금은 그 번성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 탑평리 칠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탑이며, 중앙탑이란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임진왜란 신립장군 배수진 ‘탄금대’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은 ‘중앙탑’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합니다. 충주가 우리 국토의 정 중앙이라는 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는데, 두 스님이 이 강가에서 우연히 만나 남쪽 끝과 북쪽 끝에서 동시에 출발했음을 알고 그곳이 나라의 한복판이라 하여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탑이 통일신라시대의 것임을 감안해 보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인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북쪽에 건국된 발해와 함께 남북조시대라고 해야 마땅한 그때의 국토라면 충주를 정중앙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국토로만 봐도 충주가 중앙이란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니 만주지역을 아울렀던 고구려의 영토까지는 거론할 것도 없습니다.

남한강과 달천의 합수 지역에 발달한 달천평야가 청주의 미호평야와 함께 충북의 2대 곡창지대로 꼽힙니다. 1985년 충주시 종민동과 동량면 조동리 앞 계곡을 가로막아 완공한 충주댐은 소양강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저수능력을 자랑하며 거대한 내륙호수인 충주호를 형성하여 충주를 호반 관광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충주댐 건설로 안개 발생일수가 크게 증가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충주는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많아 전국 제일의 사과 산지로도 명성이 높습니다.

신라 때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전하는 탄금대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조령을 넘어온 왜군을 맞아 싸웠던 격전지로 기억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고려사》에 이미 관련 기록이 보일 만큼 유서 깊은 수안보온천도 충주의 대표적인 명물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물 좋고 풍광 빼어난 고을이라 해도 그렇지, 권태응·정호승·홍구범·이흡, 이렇게 걸출한 시인·작가를 잇달아 배출한 지역이 흔치 않은데, 그 지역유산을 나 몰라라 신경 안 쓰는 자치단체의 ‘참을성’도 참 어지간하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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