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신문에서 칼럼을 써달라고 할 때, 잠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신문은 지방지이지 전국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방지에 지역 이야기를 쓰지 않고 전국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기 지역사회에 대한 불성실로,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에 대한 실례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국가란 무엇인갗, ‘정치란 무엇인갗, ‘이성이란 무엇인갗라고 묻는 것을 이른바 ‘거대담론’이라고 부른다. 큰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현대사회의 특징을 거대담론의 붕괴라고 일컫기도 한다. 너무 큰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큰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생각해보자. 툭하면 ‘대통령’이고 퍽하면 ‘민주화’다. 정치란 우리 모두의 관심사요, 민주화는 우리 모두의 숙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너무 커서 우리들이 소화를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자.
젊은 날 최루탄이 난무하는 대학의 교정에서 뇌리에 박힌 말이 있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 들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라.’ 진리와 정의를 내세우긴 쉬워도, 휴지 한 조각 줍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때 비록 내가 그 주장을 모두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의 이론과 실천이 맞아떨어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금언으로 생각되었다.
글줄이라도 쓴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대체로 범세계적, 전국가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것이 보편성을 강조하는 지식인들의 어쩔 수 없는 명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식인은 입만 열면 조국과 민족이다. 정치가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문제에도 충실한가 물어보자.
말과 글이란 분명 대상이 있고, 목적이 있다. 그럼에도 대상과 목적을 망각한 채 글을 쓴다면, 혼자 지껄이는 말이 되고 만다. 자기 만족으로 그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말하기와 글쓰기를 싫어한다.
조용한 목소리라도 알아듣게, 어눌한 표현이라도 이해되게, 가벼운 내용이라도 감정을 실어 전달하고 싶다. ‘노동자’와 ‘농민’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기름때 묻은 자동차 정비소의 총각’과 ‘논에서 일하고 있는 시커먼 얼굴의 삼촌’을 사랑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학생 때 함께 책을 읽던 친구가 지금은 사라진 버스 차장 아가씨에게 심한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관념의 추상성이 얼마나 같잖은가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에게 노동자는 ‘공순이’와는 철저히 다른 개념이었던 것이다.
나도 직업상 자유라든가, 평등이라든가 이런 식의 큰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떠들어대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역의 문제도 산재한데, 어찌 조국통일만을 꿈꿀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우선 중앙에 맡기고, 우리는 또 다른 중심이 되어 우리의 문제를 말해야 될 때가 아닐까?
이런 문제를 찾아 논의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다고 멈춰서야 쓰겠는가? 하나씩, 둘씩, 그런 현안이 쌓이면서 우리의 상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이끌어나가야 할 사람이 바로 지역의 식자들인 것이다. 문제가 없어도 문제를 만들어내는,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지역의 문화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여론 선도자의 역할이다. 마치 소를 늘 귀찮게 만드는 등에 같은 노릇과 같다.
동서양의 사고가 다르고, 남북한의 체제가 다르듯, 중앙의 논리가 지방의 논리를 억압해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나는 ‘오늘’을 생각한다기보다는, ‘이곳’을 먼저 생각한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