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김용제의 친일 반성 진정성 의문, 권근 조선개국 변절인가?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6)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권근의 경기체가 <상대별곡>을 새긴 문학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양촌기념관 앞에 건립돼 있다. ‘상대’는 사헌부의 별칭이며, <상대별곡>은 상대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새 국가 문물제도의 훌륭함과 정연함을 칭송함으로써 창업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노래이다.

세상은 천변만화합니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고 조석으로 흐름을 바꾸는, 그 소용돌이치는 세상에 나아가 처신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뜻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는 것은 고사하고 때로 몸을 가누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게 강호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그 사정은 옳고 그름의 잣대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누구랄 것도 없이 그저 견디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평상의 삶도 그러할진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처지이고 보면 그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뭇 백성들의 곤고함이야 말할 나위가 있을까요.

그런 와중에서 개인의 재산과 목숨을 바쳐 민족의 앞날을 도모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겨레붙이를 팔아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꾀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친일 부역자들에게 우리 사회는 책임을 묻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묵인 아래 반민특위 활동이 좌절된 이후 그들이 지배세력으로서 이 나라를 쥐락펴락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무영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인의 행복은 국어(일본어) 보급에 의해 가능하다”(<국어문제회담>, 《국민문학》 1943년 1월호)라고 주장하며 조선문학의 외연 확대를 위해 일본어로 창작할 것을 호소했던 사람의 ‘작가 정신’을 기리자고 20년 가까이 혈세를 쏟아 부었다고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당신 말대로, 대한민국은 참으로 놀라운 나라입니다.

김용제 ‘고백적 친일문학론’ 발표

자신의 과거 행적을 반성한 문인이 없지는 않습니다. 음성 출신인 김용제(1909~1994)가 그런 사람입니다. 김용제 하면 흔히 역사소설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일본 유학 중에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입니다. 1930년 6월 일본의 좌익 문예동인지 《신흥시인》에 시 〈압록강〉을 발표했고, 이듬해 10월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 기관지인 《NAPF》지에 <사랑하는 대륙아>를 발표해 혁명적 시인으로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20대의 나이로 NAPF의 후신인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KOPF)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1932년 체포되어 4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했으나 1937년 7월 조선으로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그의 시는 시적 기교나 표현법의 묘미를 살리기보다는 투쟁을 앞세운 시로 현실의 광포함에 도전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김용제는 1939년 3월 《동양지광》에 <아세아의 시>를 발표하며 친일 문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나는 아세아의 부흥을 위하여 싸우고 싶다/동시에 새로운 아세아 정신을 조용히 창조하고 싶다/나는 일본국민의 애국자로서 일을 하고 싶다/동시에 새로운 일본정신을 깊이 배우고 싶다/(…)/거기에 나는 감정의 모순을 조금도 느끼지는 않는다/거기에는 아름다운 아세아적인 조화가 있을 뿐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시와 더불어 후에 단행본 《아세아시집》에 포함되는 일련의 시는 대동아공영권과 그 건설을 위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한 작품입니다. 1942년 그 《아세아시집》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제정한 제1회 국어총독문예상을 받았는데, 그는 “우리들은 지금 대전쟁을 하고 있는 일본의 국민입니다. 따라서 문학도 싸움이 안 되면 존재성이 없을 뿐 아니라 싸움을 지도하는 정신의 양식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절실히 믿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3. 21)라고 수상소감을 밝히며 상금 300원을 조선군 애국부에 국방헌금으로 기탁했습니다.

▲ 권람을 따르던 개의 무덤이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권근의 ‘상대별곡’ 문학비

그는 일제가 패전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초순까지 《매일신보》과 《동양지광》을 비롯한 여러 신문·잡지에 ‘참 열심히도’ 글을 기고하며 황은(皇恩)에 보답하고자 애썼습니다. 해방 후 김용제는 1978년 《한국문학》에 <고백적 친일문학론>을 발표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반성하는 기미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이력은, 해방 이후에도 문단의 중심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도 자신의 지난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이무영·김기진과는 사뭇 대조적인 것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1993년 8월 일본의 시문학 동인지인 《자오선》에 발표한 소설 형식의 수기 <환상>을 통해 자신의 친일은 항일 지하운동을 위한 위장친일이었다고 강변한 걸 보면 그 ‘반성’이라는 것도 단지 ‘시늉’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양촌 권근(1352~1409)의 삶은 또 다른 면에서 ‘변절’을 생각하게 합니다. 음성 생극면 방축리에 있는 ‘양촌권근삼대묘소’는 말 그대로 권근·권제·권람 3대의 묘역입니다. 양촌기념관과 함께 권근·권준·권반 3대를 제사하는 사당이 나란히 조성되어 있고, 사당 앞에는 권근이 지은 경기체가 <상대별곡>을 새긴 문학비도 건립돼 있습니다. 권근은 고려 공민왕 때 등과하여 조선 태종대까지 활동했던 문신입니다. 경서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국가의 예문과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그가 도맡아 작성할 정도였다죠. 명나라 황제가 그의 시문에 감탄했다면 문명(文名)으로서는 ‘끝판왕’이었던 셈입니다.

그가 지은 《입학도설》은 뒷날 이황 등 여러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은 경연에서 진강까지 했을 만큼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성리학의 연구와 유포·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인데, 세종 때 그의 업적을 들어 문묘에 배향하자는 공론이 일었으나 반대에 부딪쳐 끝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고려에 절의를 바치지 못하고 새 왕조에 협력함으로써 성리학의 기본 이념인 명분과 의리를 위배하였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정몽주가 이구동성으로 칭송을 받으며 영원한 충신의 상징으로 거론되는 것에 비하자면 이 ‘순정한 이율배반’ 앞에서 웃음도 탄식도 마땅치가 않습니다. 한낱 권력놀음으로써 왕조를 바꾸는 일에도 이렇듯 날이 시퍼런데 야차같이 짓쳐오는 외세의 전열 앞에서야 지키고 바꾸는 명분 다툼이 어련하겠습니까. 사람의 길, 지식인의 길을 다시금 곱씹으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삼대묘소 아래쪽에 충견총이라는 무덤이 눈에 띕니다. 권근의 손자인 권람은 한명회와 함께 계유정난의 공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죠. 그의 말년 어느 봄날 상춘연에 다녀오다 술기운에 길섶에서 잠이 들고 말았는데, 마침 산불이 일어나 불길이 번져오자 따르던 개가 근처 시냇물에 털을 적셔오기를 반복하여 불길을 막아 주인을 살렸으며, 이듬해 권람이 죽자 먹기를 그치고 슬퍼하다가 끝내 따라 죽었다고 합니다. 흔히 사람을 욕하는 말로 ‘개 같은 놈’이라 하는데, 음성을 지날 때는 깊이 생각하고 삼가야 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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