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깁다 보니 47년, 민병을 씨의 바느질인생
“중국산 삼베도 비싸, 어차피 화장할 거 광목이면 되지”

토박이 열전(13)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누구나 옷 한 벌 얻어 입고 저승길로 간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망자(亡子)에게 수의(壽衣)를 입혔다. 염습을 하는 과정에서 입에 쌀을 떠 넣으며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는 것은 살아서 굶주렸던 포한을 풀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다음 잘 닦은 시신 위에 저고리와 바지(여자는 치마), 두루마기까지 입히고 남자라면 망건에 복건까지 씌웠으니 살아서 헐벗고 천대받던 사람도 다음 세상에선 복록을 누리라는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누구나 한 번은 죽고, 옷 한 벌만 달랑 입고 저세상으로 간다고 하니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한 것도 같다. 하지만 한 번 죽는다는 사실 말고, 장례의 품격(?)은 살아서의 높고 낮음보다도 더 천층만층이다. 수의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수의라면 대개 삼베옷을 떠올리는데, 안동포로 지은 수의는 500만원을 훌쩍 넘는 것도 적지 않다. 원단에 순금도료를 입혔다는 황금수의는 무려 4000만원에 이르는 것도 있다. 조선시대 왕들도 못 입었다는 황금수의를 입고 떠나는 저승길은 얼마나 화려할까?

육거리시장과 남주동시장이 만나는 자리에 간판도 없는 수의집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이다. 일제강점기, 남석교가 묻히기 전까지는 무심천 물길이 지금의 시장통 한 가운데로 흘렀으니 이곳이 석교동이 된 것이다. 그런데 수의를 짓는다는 것은 유리창에 붙인 ‘수의전문’이라는 종이 한 장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바느질을 하는 이는 민병을 씨다. 여흥 민씨에, ‘병(炳)’은 돌림자고, ‘을(乙)’은 1935년 을해년에 태어났다고 지은 이름이란다. 그러나 주민등록상에는 1936년으로 돼있다고 귀띔해 준다. 친정은 가로수길이 시작되는 청주 강서동이다.

“몰라. 지금 보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가로수길이 다 뭐여. 그 옛날에는 거기에 미루나무가 많았지. 플라타너스인가 뭔가는 나중에 심은 겨. 차가 뭐야. 그때는 다 구루마(달구지)만 댕겼지. 장날이면 쌀 낼 거, 보리 낼 거, 콩 낼 거 다 구루마에 싣고 청주장으로 나왔으니까.”

옛 지명은 용이 승천한 우물이 있다고 해서 용정리였다. 일제강점기 청주군 서강내면에서 청원군 강서면이 됐다가 1983년 청주시로 편입돼 강서동이 된 곳이다. 민병을 씨가 청주시 남문로1가에 사는 허○○와 혼사를 치른 게 스물한 살 때라니 1955년으로 추정된다. 남편은 6.25 참전용사였다.

“당연히 중매였지. 군인 갔다 와서 더 이상 군대 갈 일 없다고, 또 촌에서 농사지을 일 없는 1등 신랑감이라고 해서 결혼한 거지. 나이가 일곱 살 차이 났어. 그런데 군대 가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늘 시름시름 아프더니만 15년 같이 살다가 간경화로 먼저 갔어. 그러고 나서 3남매 키우며 사느라고 엄청나게 고생했지.”

당시만 하더라도 결혼하고, 애를 낳은 뒤에도 입대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일단 ‘군필(軍畢)’이 1등 신랑의 조건이었던 셈이다. 시댁은 남문로1가, 옛 제일감리교회 자리에 있었다. 이 자리에 교회가 들어선 것은 1977년이고, 2003년 교회마저 이전한 뒤에는 주상복합 아파트 한 동이 세워졌다. 남편이 농사지을 일이 없었던 것은 가내수공업 형태로 사탕공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시아버지로부터 가업으로 물려받은 일이었다.

“눈깔사탕이었지 뭐. 집에서 사람들 두고 사탕을 만들어서 가게에다 납품하는 조그만 공장을 했던 건데, 조개탄으로 불을 때서 양은솥에 설탕 끓여서 만들었어. 그런데 결혼하고 한 삼 년 되니까 큰 회사에서 만드는 사탕들이 쏟아져 나오더라고. 우리는 간판도 없는 조그만 공장이니 상대가 되나?”

남편이 죽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궁리를 했단다.

“아모레 화장품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며 파는 게 있었는데, 그걸 해볼까 생각도 했지. 그런데 ‘문전문전(門前, 집집 마다라는 뜻인 듯)’ 다니는 것도 그렇고, 대문 앞에서 개짖는 소리 듣는 것도 그렇고 해서 바느질을 배운 거지. 그렇다고 가게를 낸 것은 아니고 쑥 들어간 집에 들어앉아서 입소문 듣고 손님들 오면 옷 지어준 거야. 그때는 수의 같은 거는 안 하고 곱게 치마저고리 같은 걸 만들었는데 명절 때는 몇날며칠 잠도 못자고…. 그런데 요즘은 누가 한복을 입나? 나도 안 입는데….”

수의를 짓는 것은 한복수요가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섬세한 바느질이 힘들어진 까닭도 있다. 점점 손이 떨리고 눈이 침침해져서 이제는 수의 한 벌 짓는 것도 쉽지 않단다. 그도 그럴 것이 반평생 바느질을 해오면서 손과 눈이 가장 많은 고생을 했을 터다. 가게에는 오래된 재봉틀과 오버로크 기계가 있는데 저것들도 늙어서 털털거린단다. 헌 옷 뜯어서 고쳐달라면 고쳐주고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천천히 해도 된다는 일만 맡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바느질을 놓지 않는 건 100세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때문이다.

“아들은 자꾸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데 100살 자신 친정엄마를 모시고 들어갈 순 없잖아. 내가 딸만 다섯에 장녀거든. 아들이 없으니까 내 사촌동생을 양자로 들였었는데, 우리 아버지랑 엄마랑 동갑이야. 여든둘에 아버지 돌아가시고부터는 18년 동안 내가 친정엄마를 모시고 사는 거야. 몇 년 전에 중풍으로 쓰러지셨는데, 한의원 넉 달 다니고 조금 나아지셔서 지금은 화장실 다니시고 밥숟가락은 드시니까. 그거면 됐지 뭐.”

일감이 더 줄어든 것은 상조회 때문이란다. 예전엔 수의를 미리 지어놓으면 장수한다는 속설 때문에 자기 입을 수의를 미리 마련해 놓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상조회에서 장례의 모든 것을 원스톱으로 제공한다. 그러니 부모가 맞춰놓은 수의 예약을 자식들이 와서 깬단다. 민병을 씨가 요즘 만드는 수의는 대개가 30만원 짜리 광목 수의다.

“어차피 대부분 화장을 하잖아. 땅속에서 오래 입을 것도 아니고. 광목이 후르륵 빨리 타고, 가격도 저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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