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천하의 절세미인 양귀비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흔히 암내라고 부르는 겨드랑이 밑에서 나는 액취(腋臭)였다. 그 냄새가 어찌나 지독했던지 양귀비는 이를 숨기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온천욕을 즐겼지만 그를 돌봐주는 시녀들은 속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녀들이 그 암내에 놀라며 구역질을 하거나 이를 입밖으로 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정작 그녀의 치마폭에 살던 당 현종은 극심한 축농증을 앓는 바람에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라 경문왕과 관련된 설화 역시 절대왕정시절 주군의 신상에 대한 언급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임금의 의관을 챙기는 복두장( )이 왕의 귀가 축 늘어져 있음을 알고는 이를 고민하다가 죽기 전에 대나무 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고 하니 세상 어느 누구라도 자기가 듣고 본 것에 침묵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닌 것같다. 세월호 7시간도 이래서 국민들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어서 민주국가일 수록 절대 권력자 혹은 유명 정치인들은 예외없이 대중들의 노리개가 된지 오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상털기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견제받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부패한다는 것에 천착해 이런 해작거림에 사회적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지금 미국에선 여차하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트럼프의 나체 인형이 시민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다. 그가 막말 시리즈를 쏟아내며 막가파식 리더십의 전조를 보이자 반대자들이 이같은 행위로써 그의 과장된 위상과 권위를 깎아 내리는 것이다.

이럴 때 통상 등장하는 것이 동물이다. 국가 지도자들을 특정 동물에 비유해 그 신체적 특징과 이미지를 상징화시켜 심리적 견제를 가하기 위함이다. 현재 가장 잘 나간다는 세계적 지도자인 오바마와 메르켈, 푸틴만 보더라도 그렇다. 오바마는 서로 소통 능력이 뛰어나다는 고래에, 독일 메르켈은 낙오한 동료를 끝까지 도와 함께 날아간다는 기러기에, 푸틴은 상대에 늘 위협적인 호랑이로 각각 비유되고 있다.

실제로 각 나라의 언론에는 이같은 동물을 시사만평 등에 등장시켜 당사자들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달변의 오바마는 말만 근사하지 뭐 하나 이룬 게 없다며 혼자 유유자적하는 고래로, 시리아 난민구제에 가장 적극적이던 메르켈은 무슬림에 의한 각종 테러를 당한 이후로는 총맞아 축늘어진 기러기로, 틈만 나면 웃통을 벗어던지며 근육을 자랑하는 푸틴은 소리만 으르렁거리는 개념없는 호랑이로 비유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최고 지도자도 ‘닭’에 비유되며 갖은 말들을 만들어 낸다. 보통 사람들의 SNS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 또한 닭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내용들이 하나같이 극도의 냉소와 적개심으로 도배질 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향욱의 “민중은 개 돼지”라는 막말을 계기로 대통령을 비롯한 특정인들에 대한 동물 비유가 그 어느때보다도 자연스럽게 들리고 또한 활성화되고(?) 있지만 외국의 사례처럼 세련되지는 못하다. 당당하고 건전한 비판이기보다는 그저 상대를 깎아 내려 욕을 먹이려는 의도만 잔뜩 묻어난다. 이것들이 지나칠 정도로 비아냥, 냉소적으로 변질되는 현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지난번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국민이 자기 비하의 늪에 빠져 대한민국의 잘 나가는 실체를 습관적으로 부정한다는 취지의 질타를 내던졌다. 사회 각계에 만연한 극도의 불신과 갈등의 원인을 지적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이는 잘못된 발상이다. 지금 국가의 미래가 걱정될 정도로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국민들의 자기 비하가 아니라 앞에서 지적한처럼 끝간데없는 ‘냉소’다. 멀게는 국가리더십에서부터 가깝게는 주변인과의 하찮은 관계에서조차 도무지 서로 믿고 따르려고를 하지 않는다.

자기 비하와, 상대에 대한 냉소는 언어적 의미에서부터 크게 다르다. 자기 비하는 비록 개인의 정체성 및 자신감 부재로 나타나는 심리적 일탈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는 되레 상대에 대한 인정과 겸양이 될 수도 있다. 반면 냉소는 상대에 대한 무시 내지 증오의 발로이기에 다분히 공격적이 된다. 지금 이같은 국민적 정서가 ‘닭’이라는 동물을 매개로 대책없이 표출되는 현실을 위정자들은 두눈 부릅뜨고 직시해도 시원찮을 판에 들리는 얘기는 여전히 남탓이다.

닭은 성질이 까탈스럽고 머리가 나쁜 동물로 대표된다. 하기사 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머리를 구석에 처박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닭을 보면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닭만큼 용맹성과 모성애가 뛰어난 동물도 없다. 옛날, 이른바 이발소 그림을 대표하던 것도 새끼들을 거느리고 먹이를 쪼아주는 어미닭의 모습이다. 화려한 닭벼슬을 곧추세운 수컷의 위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디 그 뿐인가. 닭은 절대로 머리가 나쁘지 않다. 주인을 알아보고 자신에게 호불호를 표현하는 사람들을 가려서 인식할 정도로 똑똑하다. 사상 초유의 무더위로 몸살을 앓은 올 여름, 더위와 상극인 닭이 유난히 피해를 입었다. 가뜩이나 열받는 닭을 더 이상 욕되게 하면 안 되겠다. 밉다면 사람이 밉지 동물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도 닭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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