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모기장, 겨울엔 양말 파는 신원상회 신용우씨
자전거로 마을방역 30년, 가게는 ‘육거리시장 사랑방’

토박이 열전(12)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노인이 ‘죽고 싶다’는 말과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 그리고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은 고금을 통틀어 3대 거짓말로 통해 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 모든 명제가 무조건 ‘거짓’은 아니다. 그래도 ‘장사꾼이 밑지고 팔겠어?’ 했는데, 밑지기로 작정하고 파는 이야 없겠지만 돈 버는 게 목적이 아닌 장사꾼은 있다. 육거리시장 신원상회 신용우(1948년 생) 씨가 그런 사람이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신 씨의 근황이 그렇다.

“내가 말이요, 이 가게에 정(情)이 있어서 장사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수도 없이 꼬이거든. 솔직히 모기장이 얼마나 팔리겠어요. 모기장 큰 게 1만5000원인데, 어쩌다 한두 개 팔리면 그만이지. 용돈도 못 벌어요. 집세만 내면 다행이지. 아침 일곱 시에 문 열어서 오후 다섯 시 반이면 딱 문 닫고 여기 모인 이들하고 술 한 잔 마시러 가요. 이 나이에 경로당 가기도 그렇고,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온 사람들하고 정을 나누는 거지요. 30년, 40년 단골 중에는 팔십 먹고 구십 먹은 아주머니들도 있어요. 그 양반들이 그래요. ‘1년 뒤에 나 안 보이면 죽은 줄 알아….’ 그런 이들이 있으니까 계속 장사하는 거예요.”

아주머니 얘기에서는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장날마다 오던 그 아주머니들이 이제는 명절 밑에만 온단다. 신원상회는 육거리시장의 초입 제일교회 인근에 있다. 전 골목, 떡 골목으로 통하는 곳에 모기장 가게라니 굴러온 돌처럼 보이지만 이 골목에 새 점포 열두 개를 분양했던 1978년에 입주한 터줏대감이란다.

옛 청원군 남일면이 고향인 신용우 씨는 열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6남매의 맏이로 안 해본 고생이 없단다. 1969년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1971년 8월 베트남에서 돌아와 남주동시장 이소아과 골목에 어물전을 차렸다. ‘미역장사를 하면 돈을 번다’는 소문만 믿고 차린 건데,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외장(外場)’을 다녔단다. 외장이란 청주 교외 장날을 찾아다니며 난전을 펴는 것을 말한다.

“양말장사를 하던 정 아무개라는 친구가 같이 해보자고 하더라고. 그때 사직동서 완행버스를 타면 장사꾼들 타라고 짐 싣는 자리가 있었어요. 양말 한 짐을 4만5000원에 받아서 그걸 들고 다니며 파는 거예요. 4일이 미원장, 6일이 증평장, 창리, 보은장, 신탄장, 오창장…. 이런 데로 다니며 파는데 좋은 자리는 엄두도 못내고 처음에는 뒷전에서 시작해서 슬슬 앞으로 나오는 거지. 장사는 그저 그랬어요. 명절은 대목이었고. 그래도 시골인심이 좋아서 뚤뚤 말아서 주면서 200원 달라면 200원 주고, 500원 달라면 500원 주고…. 단골은 많았지.”

그렇게 한 5년 장돌림을 하다가 1978년에 조성한 육거리시장 새 점포에 입주한 것이다. 5년 장사해서 모은 돈, 아내의 가락지, 아이들 백일반지, 돌반지 다 팔아서 가게를 얻었다. 물건은 외상으로 받았단다. 아들 이름 ‘신원식’의 앞 두 글자를 따서 ‘신원상회’라고 이름을 지었다.

모기장 장사를 시작한 것은 외장을 돌 때부터 양말을 주 품목으로 하면서도 여름에는 모기장을 팔았기 때문이다. 모기장을 떼다 판 것이 아니라 신 씨가 재단을 하고 아내 이희순 씨가 재봉질을 했단다. 지금도 여름엔 모기장을 주로로 팔고 양말과 모자를 사시사철 파니 그 옛날 난전을 그대로 옮겨온 셈이다. 청주장은 ‘2,7장’이다. 꼬박꼬박 장이 섰던 그때가 전성기였다.

“육거리시장은 교통이 좋잖아요. 시골에서 청주 나오는 길목이니까 가덕, 문의, 미원에서 오고 북으로는 내수에서도 여기까지 장을 보러왔어요. 장날은 손님이 서너 배는 많았죠. 시골아주머니들이 농사지은 거 팔려고 나왔다가 장도 보니까. 돈으로 안 주고 콩이나 깨 같은 거 하고 모기장 하고 바꿔가기도 하고, 외상도 줬어요. 그때는 ‘어디 사는 누구’라고 하면 다 믿고 줬어요. 정(情)이라는 게 있어서 가는 데만 가고, 절대 다른 가게는 안 가니까.”

옛날에는 없는 사람들이 모기장 치고, 있는 사람들은 모기약 뿌렸는데 지금은 반대가 됐단다. 모기약이 인체에도 좋을 리가 없으니 있는 사람들은 약을 안 뿌린다는 얘기다. 일리는 있는 얘긴데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식별법이 궁금하다. 어쨌든 좋은 시절이 지나갔다는데 신 씨는 돈방석에 앉아보지는 못했단다. 아쉬울 것도 없단다. 오지랖이 넓게 살아온 ‘덕’이다.

1981년 육거리시장번영회가 움틀 때 총무를 맡기 시작한 이래 1990년대까지 번영회장을 맡았고, 새마을지도자를 비롯해 온갖 동네일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두툼한 앨범 한 권이 임명장, 위촉장, 감사장, 상장 등으로 빼곡하다. 신 씨가 등장하는 신문기사도 있는데 ‘20년, 자전거로 방역봉사’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15년 전 신문기사다.

“차가 없어서 자전거로 한 게 아니라 여기가 좁은 골목들이 많아서 자전거나 리어카에 소독기를 싣고 다녔지. 남상우 시장 때인가 연막소독이 해롭다고 액체소독으로 바뀌면서 손을 놓았으니까 한 30년을 했을 거요. 땀이 비 오듯 해도 시장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모기 없애고 바퀴벌레 잡는다고 한 거예요. 번영회장 하면서는 여기 아케이드 씌우는 것도 다 한 거예요. E마트 셔틀버스 반대시위도 주도했고요. 산업자원부 갈 때는 바지저고리에 고무신 신고 갔어요. 그러면 산자부 공무원들이 충청도 양반 왔다고….”

그리 장사하면서도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했다지만 신 씨는 멋과 풍류를 안다. 벽에는 그가 쓴 글귀와 컴퓨터로 직접 편집한 그림들이 걸려있다. 친구에 대한 그의 정의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려서 만난 친구는 잊지 못할 친구고 학창시절 만난 친구는 의리에 친구였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는 더불어 사는 친구요. (후략)’ 이런 글귀나 그림들은 친분이 있는 단체나 단체의 행사 시 나눠준단다. 그리고 오후 5시30분, 지인들과 술추렴을 나설 때도 글귀와 그림을 들고 나선다. 청주시내 80곳에 자신의 글과 그림이 걸려있단다.

이야기가 늦었다. 신원상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벽 한 면을 장식한 벽화다. 첩첩산중에 골짜기마다 물이 흐르는데, 낚시질을 하는 사람, 술 마시는 사람 등 숨은 그림 찾기를 해도 신선놀음일 법하다. 원래 여름 산이었는데 붉을 색을 더해 가을 산을 만들었단다. 그리고 유난히 검은 산은 능이버섯이 많아서라니 해학적이다.

“상상의 그림입니다. 그림 속에 떡 파는 아줌마도 있어요. 낚시해서 냄비에 끓여먹고, 먹고 누울 자리만 있어도 행복한 거죠. 그게 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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