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명대의(尊明大義) ‘부패·사대주의 상징’ 화양서원·만동묘 바로 읽기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3)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제월대에서 나와 묵직한 마음을 이끌고 화양계곡으로 향합니다. 홍명희의 경우처럼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화두 때문이 아니더라도, 괴산 땅에 와서 화양동을 보고 가지 않으면 서운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쌍곡계곡을 따라 가는 517번 도로는 제수리치를 넘고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선유동에 닿습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 “금강산 다음으로는 이만한 수석이 없으니 삼남의 제일”이라고 적었을 만큼 예부터 명승으로 이름난 곳입니다.

▲ 화양동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지은 것인데,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신종과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준 의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이다.

귀어오대손(歸於五代孫) 전설, 당신은 들어보았나요? 옛날 한 나무꾼이 선유동 골짜기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건너편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두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하도 신기하고 풍치도 좋아 도끼를 옆 바위에 내려놓고 바둑 두는 것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죠. 그렇게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노인 한 분이 바둑 두기를 멈추고 얼른 돌아가라 하기에 문득 정신을 차려 집에 가려고 옆에 둔 도끼를 찾았으나 도끼자루는 썩어 없어지고 도끼만 남았더랍니다. 경황 중에 도끼만 들고 집으로 돌아가 보니 어찌된 일인지 낯선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무꾼은 기막히고 어이가 없어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하니 집주인이 하는 말이 “150년 전에 우리 5대조께서 산에 나무하러 가신 후 소식이 없다는 말이 집안에 전해 내려온다.”라고 하더랍니다. 선유동 9곡 중에 제6곡 난가대는 ‘도끼자루가 썩은 곳’이며 제7곡 기국암은 ‘바둑을 두던 바위’란 뜻이니 이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선유동 물이 화양천에 들어가 화양동계곡을 이룹니다. 화양동은 속리산 북쪽의 도명산 자락에 위치해 있어 트레킹 하기도 좋고, 또 장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탁족을 하기에도 그만이어서 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말년의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에 9곡을 정하고 일일이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송시열을 빼놓고는 얘기하기가 난처할 만큼 화양동은 그와 관련된 유적들로 가득합니다. 그 유적들이 보아서 흐뭇한 것이라면 후세에게 복된 일이겠지만, 아마도 당신은 눈살부터 찌푸릴 텐데요.

▲ 화양서원 입구의 하마소. 여기부터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 이곳에 왔다가 문지기한테 봉변을 당했을 정도로 서원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존명사상의 중심, 화양서원

송시열이 태어난 옥천을 지나면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유학사에서 그만큼 상극의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뭅니다. 송시열을 평가하는 데 악재로 작용하는 대표적인 것이 화양서원과 만동묘입니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죽은 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신원을 회복하고 제향하기 위해 1696년(숙종 22) 그의 문인 권상하·정호 등 노론계 관료와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화양동에 건립했던 서원입니다.

화양동은 송시열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곳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비례부동(非禮不動)’ 넉 자의 필적을 구하여 화양계곡의 암벽에 새겨놓고 친히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 각자하여 존명대의(尊明大義)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서원은 유생의 사학기관으로서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유학을 장려함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조선중기 이후 유생들이 곳곳에 서원을 짓고 이를 근거로 정쟁을 일삼으며 백성을 못살게 괴롭히는 폐단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화양서원은 특히 말썽이 많아 조선시대의 수많은 서원 중에서 대표 격이라 할 만했습니다.

소론과의 당쟁에서 송시열이 노론측 정치 명분의 상징으로 추앙됨에 따라 화양서원은 노론 사림의 본거지가 되었고, 영조 때에 이르러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고 또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해갔습니다. 국가에서 물질적 지원은 물론, 노론 관료나 유생들의 기증으로 서원 소속 토지가 크게 늘어나 강원도와 삼남 일대에 널리 퍼졌는데, 이 때부터 이 서원은 점차 민폐의 온상으로 변해갔습니다. 특히 제수전(祭需錢)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고지서인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의 폐해는 극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번 묵패가 발행되면 지방의 수령이라도 거역하지 못했으니, 이를 거부하는 수령은 통문(通文)을 돌려 쫓아내려고 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했기 때문이죠. 이 지경이니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일단 묵패를 받게 되면 사유를 불문하고 논밭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고, 만일 지시를 어길 때는 서원 뜰로 끌려가서 요구된 금품이 마련될 때까지 감금당하거나 사형(私刑)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화양묵패는 약탈을 전제로 한 협박장이나 다를 바 없었던 거죠.

▲ 송시열이 독서하며 은거했던 화양동 암서재. 화양계곡엔 송시열과 관련된 유적으로 가득하다.

중국을 바라보는 북향 ‘만동묘’

만동묘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신종과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준 의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인데, 송시열이 사약을 받으며 남긴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지었습니다. 대부분의 집이나 사찰·사당·서당을 햇볕이 잘 드는 동향이나 남향 또는 동남향으로 짓는 것에 비해 화양서원과 만동묘 사당은 굳이 북향하여 지었습니다.

명나라를 향한 사대의식의 발로였는데, 단순히 국가 존망의 위기에 도움을 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하는 것으로 보기엔 민망한 구석이 있습니다. 더구나 명의 입장인즉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조선이 무너질 경우 전란의 화가 자국의 영토까지 미칠 것을 우려한 끝에 파병을 결정했던 배경을 감안해 보면 어이없는 오버액션이란 생각마저 듭니다.

▲ 송시열이 화양계곡의 암벽에 친히 새긴 ‘대명천지 숭정일월’ 각자. 그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필적 ‘비례부동’ 넉 자와 함께 새기고 화양동을 존명대의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다.

썩은 선비들의 집합소이자 사대주의 소굴이었던 화양서원과 만동묘. 화양동 입구 하마소(下馬所)부터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고,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갈 때에는 허리를 굽히고 양손을 공손히 모아 사타구니에 대고 걸어가야 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남자의 생식기를 쥐고 걸어가는 것처럼 보여 속된말로 ‘X 잡고 화양동 간다’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곳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던지 흥선 대원군이 초야에서 몸을 낮추고 지내던 시절 이곳에 들렀다가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여 문지기한테 봉변을 당했을 정도였습니다. 1864년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서원 철폐가 시작되었는데, 가장 먼저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철퇴를 맞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거죠. 그것도 유적이라고 천금을 들여 보수하고 정비하는 마음을 나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책임감 없이 권력만 향유하는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당신이 말했듯이 조선의 망국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수려한 산수를 앞에 두고서도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