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넘어서 60년 가겠다’ 형통슈퍼 김성태 씨
짐자전거, 공병장사로 시작…성안길 성쇠 지켜봐

토박이 열전(11)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청주시 용담동에서 태어나 중앙국민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제일교회가 운영하던 청신고등공민학교를 통해 주경야독의 꿈을 이루려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소년은 빈 소주병이나 맥주병을 모아서 파는 ‘공병(空甁)장사’에 뛰어들었다. 이왕 빈 병을 나르는 김에 짐자전거로 소주나 맥주, 청주를 배달하는 주류 유통에도 손을 댔다. 그러다가 형통상회를 인수한 것은 김성태(1953년생) 씨가 스물한 살이 되던 1973년이다.

당시 형통상회는 지금의 도청사거리가 아니라 상당구청(옛 청원군청) 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사거리에 있었단다. 그러니까 코오롱스포츠 옆 구둣가게 자리(북문로 1가 27번지)가 형통상회였던 셈이다. 김성태 씨는 가게를 연지 4년 만에 두 살 연하인 김용희 씨와 결혼했고, 1978년과 1980년에 두 아들을 낳았다. 가게에 딸린 두 평 남짓 단칸방에서 시작된 역사다.

“말도 못했어요. 부엌도 없이 연탄아궁이 하나로 밥 해먹고 살았으니까. 그 좁은 곳에 네 식구가 살려니까 밤이면 한증막이 되고, 고생 엄청나게 했지요. 가게 건너에 정산부인과가 있었는데 1980년쯤인가에 그 건물을 부수고 서울병원이 들어온 거예요. 그때 우리 애들이 애기였는데 공사하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그랬으니까. 서울병원이 9층인가 됐잖아요. 큰 병원이 들어오고 장사가 되기 시작하니까 건물주 아들이 직접 장사를 한다고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도청사거리, 대원상회 자리로 옮긴 거예요. 그게 1983년이죠.”

대원상회 간판을 내리고 형통상회 간판을 달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위기가 곧 기회가 된 셈이다. 서울병원을 운영하던 나 모씨가 1989년 청주시 율량동에 종합병원인 리라병원을 설립하면서, 서울병원을 폐업했기 때문이다. 대신 신작로였던 도청 앞 큰길에는 차량과 인파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 특히 충북도청 서문 맞은편과 옛 세무서 앞의 버스정류장은 청주 외곽으로 드나드는 일종의 관문이었다.

“지금은 오창이나 증평, 가덕, 문의가 지척이잖아요.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버스 타고 고향 간다고 했어요. 가게에서 정종(일본 淸酒 상표명)이나 과일, 음료수 같은 거를 바리바리 사들고 버스를 탔으니까요. 마이카 시대가 되면서 다들 승용차를 끌고 다니니까 점점 손님이 줄어들더라고요. 지금은 청소년들이나 담배손님만 와요.”

‘벤또(도시락)’나 ‘쓰봉(바지)’ 같은 일본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혼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청주 성안길은 ‘본정통(本町通)’, 즉 ‘혼마치’였다. 그런 일본말 부스러기들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때까지가 형통상회와 성안길의 전성기였다. 건물마다 식당이나 다방이 있었고 성안길 요소요소가 만남의 광장이었다. 서너 집 건너 하나씩 구멍가게 같은 점방이 있었지만 다들 장사하는 재미가 쏠쏠했단다.

“요 안쪽으로 길손회관이 있었고 지금 오수희 미용실 쪽으로는 양지싸롱이 있었죠. 새벽까지 사람들 술 마시고 흥청거리고, 우리는 새벽 2시까지 장사를 했죠. 지금 코오롱 스포츠 자리는 태동관이었는데, 그때는 도청공무원들이 다 태동관 짜장면 먹었어요. 홀에 와서 먹고, 시켜서 먹고…. 지금 국민은행 자리가 원래 중앙교회였다가 주택은행이 됐고, 나중에 국민은행이 된 거죠. 그 옆에 커피숍 자리가 충북은행 중앙지점이었고요. 그런 은행에도 명절에는 우리가 납품을 했어요. 그때는 식용유나 설탕 같은 거…. 그런 거 포장하느라고 며칠씩 밤을 새고 그랬어요. 포장해서 인도에 쌓아놓았는데 비가 쏟아져서 포장이 흠뻑 젖기도 했어요.”

그 많던 술집과 다방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술집 대부분은 신도심이나 부심으로 옮겨가 지금도 불야성이다. 식당은 그렇다 치고 다방보다 많은 커피숍이 생겨났지만 슈퍼의 수입과 연결되는 함수관계는 예전처럼 정비례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얼까?

김 씨는 정확한 원인을 분석할 수 없다. 다만 43년을 한 결 같이 가게 문을 열고 닫는다. 지금도 오전 9시면 문을 열어서 밤 11시까지는 장사를 한다. 예전에는 추석이나 설이 대목이어서 며칠씩 밤을 샜다. 지금은 손님이 없더라도 당일만 빼고 문을 연다. 흐르는 곳이라 뜨내기손님이 많을 듯싶지만, 연륜이 맺어준 단골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다.

취재를 하는 중에 60대로 보이는 여성이 들어왔다. 손님은 계산대 위에 올린 가방의 지퍼를 열었고, 김 씨는 청포도 사탕 두 봉지를 뜯어 가방 안에 부었다. 손님은 값을 치르고 가게 문을 나섰다. 이 모든 과정에 대화는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석내과에 고정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인데, 그때마다 사탕을 사러온다는 것이다.

가게 자리가 자리다 보니 민주화운동의 도도한 흐름이 가게 앞으로 물결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때였죠. 큰길에는 시위대가 진을 치고, 양쪽 골목에는 경찰들이 포진하고 있다가 ‘쏴’하면 최루탄을 쏘아대고 돌이 날아들고…. 그때 최루탄이라는 걸 처음 알았죠. 매워서 기침이 나고 눈물이 나도 가게 안에 갇혀있었죠. 학생들은 보도블록 깨는 사람 따로 있고, 던지는 사람 따로 있고….”

좋은 시절이 머물다 간 것은 분명하지만 움켜쥐고 붙들어 놓은 것은 없다. 하지만 못 배운 게 한이었기에 애들 공부시키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집 한 채 마련했으니 아쉬울 것도 없단다. 여섯 평 가게 안에 갇혀 산 것도 아니었다. 20여 년 동안 문화동, 성안동에서 통장, 주민자치위원으로 일하면서 청주시장 표창만 네 번을 받고, 적십자사, 청소년지원센터로부터 공로패도 받았다. 산을 좋아하는 터라 틈틈이 산행에 나서 북에 백두에서 남에 한라까지 명산의 정상을 두 발로 밟기도 했다.

무엇보다 상 받을 일은 이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김성태 씨는 충청북도가 선정한 ‘자랑스러운 평생직업인’이다. 반세기까지 이제 7년이 남았다. 문을 열어도 남는 장사는 아니란다. 김 씨는 이면지에 적어놓은 하루 매출을 보여주며 그래도 기운이 닿는 한 계속 장사를 하겠다고 했다. 반세기를 넘어 환갑까지 형통슈퍼의 ‘형통(亨通)’을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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