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 민족해방 위해 헌신 불구 이념의 틀 속에 매몰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1)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벽초 홍명희

당신에게 말하기에도 어쭙잖긴 합니다만, 나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소설 《임꺽정》을 읽으면서 홍명희(1888~1968)를 처음 알게 되었죠. 재미도 재미려니와 우리나라 말법[語法]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에 감탄하면서도 소설을 쓴 작가가 우리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지역의 문학단체에 나가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하면서 홍명희라는 ‘우뚝한 선배’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괴산에 들러 벽초 홍명희를 만나지 못하면 반은 헛걸음이라고 흰소리를 할 만큼 괴산과 홍명희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고, 오늘날 괴산에서 홍명희는 ‘전범(戰犯)’으로 취급되어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입니다.

홍명희는 조선 후기 명문 사대가인 풍산 홍씨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한국 근대 작가들 중 그만큼 화려한 가문을 가진 사람도 드물거니와, 요즘 시쳇말로 ‘금수저’에 속했던 사람이죠. 그가 소설 《임꺽정》에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풍속과 일상생활을 놀라우리만치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출신 배경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어진 신분의 벽에 갇히지 않고 임꺽정 같은 하층민을 포함한 민중들 정서에 다가가려 했던 열린 지식인의 태도를 보여준 거죠.

홍명희는 박은식·신규식을 중심으로 한 동제사(同濟社)의 해외 독립 운동에 가담했고, 3·1 운동 때는 충북에서 처음으로 괴산의 만세운동을 이끌었으며, 민족연합전선체인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여 좌·우익을 망라한 민족진영의 연대를 위해 노력했던 민족 지도자였습니다. 또 동아일보 주필·시대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며,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이기도 했습니다.

▲ ‘동부리 고가’란 이름으로 중수된 홍명희 생가. 조선시대 사대부가를 잘 보여주는 문화재이기도 하고, 사랑채는 괴산 만세운동 때에 주동자들이 모여 태극기를 그리며 시위를 준비하던 현장이기도 하다. 사진 오른쪽의 비는 홍명희의 부친인 홍범식의 순절을 기린 순절비이다.

단재 신채호와 각별한 우정

“산같이 쌓였던 말이 붓을 잡고 보니, 물같이 새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부터 써야 할는지요. 세전(歲前)인가 언제 서중(書中)에 “홍 선생은 검사국으로 넘어갔습니다” 한, 두미(頭尾) 모르는 소식을 들었더니 지금도 형이 그 곳에 계신지요. 제(弟) 불원간 아마 십년 역소(役所)로 발정(發程)할 것이니, 아 - 이 세상에서 다시 면목(面目)으로 상봉하게 될는지가 의문입니다. 형에게 한 마디 말을 올리려고 이 붓이 뜁니다. 그러나 억지로 참습니다. 참자니 가슴이 아픕니다마는 말하련즉 뼈가 저립니다. 그래서 아픈 가슴을 부둥키어 쥐고 운명이 정한 길로 갑니다.”

이 글은 신채호가 홍명희에게 보낸 옥중서신 중 일부입니다. 두 사람의 우의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은데, 칼날 같고 북풍의 서리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드물었던 신채호의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만, 여덟 살 연상이면서도 ‘제(弟)’라는 겸양을 표한 것을 보면 홍명희의 인물 됨됨이를 어느 정도로 신뢰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이 언제 씌었는가는 편지 뒷부분이 유실된 관계로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홍명희가 검사국으로 넘어간 다음 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홍명희가 신간회 활동으로 인하여 검사국으로 넘어간 1930년 이듬해인 1931년 신채호는 옥중에서 이처럼 애절한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십 년 역소로 발정한다는 것은 대련에서 뤼순 감옥으로 간다는 것이니 이감되던 1932년 전의 심경입니다. 신채호가 홍명희에게 하고 싶었던 ‘한 마디 말’, 참자니 가슴이 아프고 말하려니 뼈가 저린 그 말은 ‘국권회복, 자주독립’이 아니었을까요?

1936년 신채호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홍명희는 곡합니다. “단재(丹齋)가 죽다니, 죽고 사는 것이 어떠한 큰일인데 기별도 미리 안 하고 슬그머니 죽는 법이 있는가.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한다. 나만 사람이라도 단재가 지기(知己)로 허(許)하고 사랑하는 터이니 죽지 못한다 말리면 죽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죽다니 무슨 소린고. 세상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떠들더라도 나는 죽지 않았거니 믿고 싶다.”

두 사람은 사상과 언행에서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일찍이 ‘나의 오십 반생에 중심으로 경앙하는 친구’라며 신채호에 대한 흠모의 정을 보였던 홍명희는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당대의 인물을 논하는 자리에서 모두를 기껏 능재(能才)로 평하던 것을 감안하면 예사롭지 않은 존경의 표현입니다.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 더불어서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이광수·최남선이 ‘민족개량’을 논하며 친일의 길을 걸었던 반면 홍명희는 시종 ‘민족해방’ 노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라’던 부친의 유훈을 끝내 받들어 지킨 셈입니다.

▲ 1919년 3월 19일 충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괴산 만세운동 유적비에 홍명희 이름이 보인다(동그라미 안). 홍명희는 이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이때 가족들은 동부리 고가를 팔고 제월리로 이사했다.

“독립 만세!/독립 만세!/천둥인 듯/산천이 다 울린다/지동인 듯/땅덩이가 흔들린다/이것이 꿈인가?/생시라도 꿈만 같다//아이도 뛰며 만세/어른도 뛰며 만세/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만세 만세/산천도 빛이 나고/초목도 빛이 나고/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유난히 명랑하다”(홍명희 시 <눈물 섞인 노래> 부분)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 민주독립당의 대표로서 민족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통일전선 운동에 진력하던 홍명희는 남북연석회의를 위해 평양에 갔다가 북에 남았는데, 그 후 그곳에서 부수상, 과학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괴산에선 ‘전범’ 취급 논란

이쯤 되면 괴산에 와서 홍명희를 만났다고 해도 ‘역사소설 《임꺽정》을 저술한 월북작가’ 정도로 알고 지나가면 다시 반은 손해가 될 듯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성리학의 세계로부터 근대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부단히 혁신해 나간 특이한 지성의 소유자이며,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해방 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3년여 동안의 옥고를 치렀거니와 일신을 돌보지 않고 헌신했던 삶에 대해서 남과 북, 그 이념의 벽을 넘어 민족의 이름으로 합당한 평가를 해야 할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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