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은 한국인의 영원한 향수다. 아리랑은 우리의 정서를 가장 잘 담은 국민가요다. 지금까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아리랑처럼 많이 불린 가요는 없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도 우리는 아리랑을 응원가 삼아 합창하였고, 남북 이산가족이 만날때에도 아리랑을 서럽게 서럽게 부르며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

 아리랑이 이토록 국민애창곡 1위를 기록하며 한국인의 영원한 노래로 회자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아마도 아리랑이 담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 때문일 것이다. 정(情)과 한(恨)으로 대변되는 한국인의 정서는 참으로 유별나다.

 무슨 정과 한이 그리 많기에, 시도 때도 없이 범 민족적인 정서가 아리랑으로 형상화되어 그리움이라는 폭넓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것일까. 참았던 설움, 북받친 아픔의 요소들이 내재되어 집결해 있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면 화산처럼 분출되고 마는 것이다.

 아리랑은 전국에 걸쳐 수도 없이 많이 산재해 있다. ‘긴 아리랑’을 비롯하여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이 가장 많이 불리고 있으나 이외에도 수 백 종의 아리랑이 전하며, 노랫말의 변종까지 이르면 수천 곡에 이른다.

 ‘청주 아리랑’은 반세기 이상을 잊혀져 오다 1990년대 초 연변에서 기적같이 찾아졌다. 일제시대, 충북인이 정착한 연변 정암촌에서 신철씨 등에 의해 불려지던 것을 연변의 김봉관씨가 채록했고 이 채록본을 충북대 임동철 교수가 찾아내고 현지조사를 통해 보완하면서 ‘청주 아리랑’이 되살아 난 것이다.

 “시아버지 골난 데는 술 받아주고/ 시어머니 골난 데는 이 잡아 준다/ 새애끼가 골난 데는 엿 사다 주고/ 며늘애기 골난 데는 홍두깨 찜질/ 아리랑 타령이 얼마나 좋은지/ 밥 푸다 말구서 엉덩춤 춘다...중략”

 청주 아리랑의 발견에는 슬픈 이민사가 점철돼 있다. 1930년대 중반, 만척주식회사는 충북에 사람을 파견하여 이주민을 모집하였다. 일제의 침탈에 멀미가 난 사람들은 조밥이라도 실컷 먹어볼까 해서 정든 고장을 떠났다.

 “북 간도의 감자는 물동이만 하더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너도나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때 1백80세대가 만주로 향했는데 대개 보은, 옥천, 청주사람들이었다. 이 중 왕청현 대흥구로 1백 세대가 가고, 80세대는 두만강에서 20여 리 떨어진 양수진 정암촌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봇짐을 챙길 때 생활도구만 챙긴 것이 아니라 고향의 노래 ‘청주 아리랑’과 심청전, 춘향전 등 겨레의 얼도 담은 것이다.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에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황무지를 일구다 지치면 ‘청주 아리랑’을 부르며 심신의 피로를 달랬던 것이다.

 ‘청주 아리랑’의 발견은 분명 청주 문화의 정체성 확립에 큰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청주사람들의 민요가 거의 잊혀져 강원도 정선지방의 민요에 동화될 무렵, 만주에서는 청주의 얼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정선아리랑’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가사와 음정에는 청주의 독특한 체취가 물씬 묻어난다.

 청주 아리랑을 처음 채록한 김봉관 씨는 “청주 아리랑을 청주에서 품어달라”고 호소했다. 중국 사회가 개방화 물결을 맞으며 인구이동이 잦아지고 정암촌의 인구도 줄어 보존상의 문제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70년만에 돌아온 청주의 노래 ‘청주 아리랑’ 원형을 잘 보존하고 또 한편으로는 현대 감각에 맞게 편곡하여 청주의 노래로 불리웠으면 한다. 청주사람 모두가 청주 아리랑을 아끼고 불러준다면 조만간 청주의 대표적 노래로 뿌리를 내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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