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 활동이 한창이던 49년 5월,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현역 국회의원 4명을 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구속된 의원들은 반민특위를 지지하고 외국군 완전철수,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장해온 진보적 소장의원들이었다.

국회가 프락치 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자 우익단체에서는 일제히 ‘국회내 빨갱이를 추방하라’는 관제 데모를 벌였고 반민특위에 대해서도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애초 반민법 제정을 마땅치않게 여겼던 이승만 대통령도 노골적으로 반민특위의 발목을 잡고 나섰다. 49년 2월 일제 사찰경찰 출신의 노덕술과 최연이 체포되자 내무장관 신성모와 법무장관 이인을 불러 대책을 세우라고 호통쳤고 국무회의에서 반민법 일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아예 대국민담화문을 통해 “근자 조사위원회에서는 조사위원들이 경찰관 2,3명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을 잡아다가 구금 고문한다는 보도가 있는데, 이는 국회가 조사위원회를 조직한 본 의도가 아니요, 정부로서도 포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대해 김상돈 위원등은 “대통령의 담화는 친일파를 옹호하겠다는 저의를 드러낸 것”이라고 일축했다. 국회도 정부의 개정안을 부결시켰고 이승만의 적대적 태도는 더욱 깊어졌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시작된 관제 데모는 6월들어 급기야 반민특위 건물 앞까지 몰려와 ‘빨갱이 집단’으로 매도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반민특위에서 경찰에 경비를 의뢰했지만 외면당했고 오히려 데모의 배경에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개입됐다는 혐의점을 포착해 구속시켰다. 사찰과장이 구속되자 사찰경찰 150여명이 일제히 사표를 냈고 이어 서울시경 산하 전사법경찰이 반민특위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며 집단 사직서를 냈다.

이대통령 믿고 경찰 불법적 무력사용
이에따라 경찰 수뇌부는 무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키로 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에게 사전보고해 내락을 받아냈다. 마침내 6월 6일 관할서인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여명의 무장경찰이 새벽부터 특위본부로 출동대기했다가 출근하는 특위위원들을 모두 체포하는 불법행위를 자행하게 된다.


“나는 평소와 같이 오전 9시 특경대원 2명과 함께 출근했다.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경비경찰의 복장이 다르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5명의 무장 경찰관이 우릴 에워싸고 그 중 3명은 특경대원의 손을 비틀어 뒤로 제치고 한명은 권총과 신분증을 빼앗고 사무실 후문쪽으로 끌고갔다. 내게도 총부리를 옆구리에 대고 손을 머리위로 얹으라고 하며 권총과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게 누구의 명령이냐’며 대항하자 총대로 내려치고 발로 찼다. 결국 강제로 빼앗기고 사무실 뒷마당으로 끌려갔다”


뒷마당에는 먼저 출근한 특위, 특검, 조사관과 낯이 익은 국회의원 등 모두 머리에 손을 얹고 땅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심지어 검찰총장이자 반민특위 검찰관장인 권승렬도 꿇어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권총장이 강제로 무장해제 당했는지 여부에 대해 취재하기도 했으나 정옹의 증언에 따르면 일개 경찰서장의 하극상에 무릎까지 꿇리는 모욕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2시간만에 반민특위 특경대원 32명을 트럭에 태워 연행해갔고 특위 관계자들은 허탈한 심정으로 사무실에서 대기했다.


“그날 국회에서 내각 총사퇴 결의안을 가결하고 대통령 하야까지 거론됐지만 한번 쏟아진 물은 다시 담기 불가능했다. 이미 특위 활동은 무기력하고 일할 의욕이 상실됐다. 각종 서류도 경찰난입으로 찢어지고 분실돼 잔무 정리나 하는 수준이었다. 다시 경찰로 돌아간 특경대원들은 집단적으로 구타당하는등 피해가 심각해 국회차원에서 모두 적십자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거나 보호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반민특위 조사관, 신변위협으로 피신급급
여기에 제2차 국회프락치 사건이 터지면서 반민특위의 절대 지지세력이었던 의원13명이 구속됐다. 이승만의 묵인하에 사찰경찰 조직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반민특위의 뿌리를 뒤흔든 것이었다. 매카시즘의 공포감속에 국회는 7월 6일 반민특위 공소시효 단축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당초 50년 6월 20일로 정한 공소시효 49년 8월 31일로 단축시킴으로써 사실상 남은 조사기간은 1개월에 불과했다.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조사위원들이 사퇴했고 같은 해 ?월 반민특위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오히려 반민특위 관계자들을 공산주의자처럼 매도하고 협박하니 극도로 신변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집에도 못들어가고 친구집을 전전했고 심지어 얼굴도 한번 못본 먼 친척집엘 찾아가 한겨울 냉방에서 사흘동안 버틴 적도 있다. 당초 반민특위 활동이 끝나면 해당 직급(서기관) 공무원으로 임용하기로 약속했었는데, 그것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그냥 뿔뿔이 헤어진 형국이었다”


김구 선생까지 보수우익의 흉탄에 쓰러지자 세상은 친일-반일 구도는 사라지고 반공-친공으로 덧칠됐다. 좌익과 공산주의자를 찾아 색출하는 것이 이승만 정권의 지상명제가 됐고 국가보안법을 통해 잠재적 경쟁상대인 진보적 정치지도자까지 마구잡이로 처단했다. 반민특위 종사자들은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 친목모임조차 만들지 못했고 각 자 살아가기 급급했다.


“이듬해 윤보선씨(당시 상공부장관)가 주선해서 서울 피혁회사에 취직이 됐고 가까스로 5남매를 키웠다. 생전에는 같은 제2조사부 소속이었던 이원용 선배(2002년 작고)를 만났었고, 그 분 돌아가시고 나서 조문기 이사장(민족문제연구소)과 반민특위 관계자 가족 등이 참여하는‘민족정기를 이어가는 모임’을 만들어서 4명이 매달 한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을 정치적 이해득실로 따지지 말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큰 뜻에서 함께 동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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