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의 편집인

위기의 대학을 취재하면서 이 나라 고등교육 시스템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갈수록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약 10년 전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1995년 기자는 모 일간지에서 교육을 담당했다. 당시 교육당국자들은 입만 열면 “학교 급별(級別) 학생수를 고려할 때 앞으로 4∼5년 내 고교 졸업생 정원이 대학 입학정원에 미달되는 사태가 도래할 것”이라며 “그 때 가면 진학 희망자 모두 경쟁 없이 대학에 갈 수 있는, 꿈같은 시대가 올 것”이라며 들떠 했다.

이런 셈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부는 몇 년 뒤 “한 두 가지 특기만 잘 해도 대학에 갈 수 있게 하겠다”는 신기루 같은 공약으로 학생들을 현혹했다. 교육계 일각에서 제기되던 “거품이 잔뜩 든 대학을 이렇게 놔 둬도 되느냐”는 경고음은 무시됐다. 대신 늙은 교사 한 명 내보내면 젊은 교사 두 세 명은 쓸 수 있다는 논리로 교사 정년 단축이 단행됐다. 그 뒤 일선 학교들은 교사 부족난으로 파행을 겪어야 했고, ‘이해찬 세대’는 학력저하의 희생양이 돼야 했다. 하지만 정작 고교 졸업생보다 많은 정원을 가진 몸집 크고 힘 센 대학에는 서슬퍼런 칼날을 겨누지 조차 못했다.

이 와중에서 대학들은 계속 우후죽순 신설됐고, 저마다 ‘학생장사’를 위해 교육부에 로비를 펼치며 정원을 한 명이라도 더 늘리는 데 혈안이 됐다. 대학들이 이럴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기막힌 역설의 시장법칙이 작용했다. 대학 수와 정원이 늘어난 만큼 경쟁이 치열해지며 학생 모집에 애로를 겪게되자 기업이나 쓸 법한 공격적 마케팅 방법을 동원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엄정한 관리자이자 심판의 본분보다는 대학들의 논리에 편승하면서 대학버블을 부채질했다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물론 국공립 대학뿐 아니라 사립대학들이 고등교육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 하지만 교육은 양뿐 아니라 질도 중요하다는 간단한 사실을 대학과 교육당국은 애써 외면했던 게 분명하다. 개혁 무풍지대에서 과거처럼 깃발만 세우면 저절로 학생이 몰려 들 것이란 그릇된 신화에 도취해 있던 대학들이 이제 존립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기막힌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나, 교수들이 살아남기 위해 쉽사리 전공전환의 유혹에 빠져들며 대학교육의 ‘품질 저하’를 걱정케 하는 지금의 상황은 자업자득적 귀결인 지 모른다. 고등학교보다 시설이 못한 전문대의 양산을 방치하며 공학 및 사학 비리에 엄정하지 못한 교육 당국의 개혁의지 부재도 여기엔 있다.

더구나 대학교육의 보편화와 평준화라는 포퓰리즘에 빠져버린 교육정책은 교육의 가장 교육적인 특성인 ‘경쟁’은 무시한 채 ‘모든 고교 졸업생의 대학생화’라는 학력거품과 이로 인해 사교육비보다 큰 사회적 비용을 양산하고 있다. 제대로 된 진로교육을 통해 일찍 사회로 진출해야 했을 학생마저 대학생이 되기 위해 최소 2년 이상 금싸라기 같은 시간지체를 거쳐 교문을 나서지만 이내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는 지금의 현실이 이런 지적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고등교육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속에서 숱한 대학과 교수들이 기울이는 눈물겨운 노력은 이제 비로소 대학교육이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뼈아픈 생존기의 첫 장을 이제 막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