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고구려비에 대한 설명과 해석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인터넷 상에서도 엄청나다. 이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고구려비의 내용보다는 그 인생유전(?)이다.

발견될 당시와 그 이전의 과거 궤적에 대한 무수한 얘기들이 떠돌고 있다. 예를 들어 발견되기 전엔 대장간의 주춧돌로 사용됐다느니, 동네 아낙들의 빨래판으로 사용됐다느니, 아들을 낳기 위한 기원의 상징물이었다느니, 동네 남정네들이 일하다 말고 심심풀이 삼아 낫으로 쪼는 바람에 비문이 없어졌다느니, 넘어져 방치되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니 하는 별 오만가지 사연들이 자료와 구전으로 회자돼 왔다.

   
특히 인터넷상의 자료엔 대장간 및 빨래판, 그리고 백설기 얘기가 빠짐없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보니 그 자체가 이미 역사적 사실로 인식될 정도다. 이 말들이 사실이라면 고구려비는 그야말로 이것 저것에 채이고 무시당하는 마을의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현지인들의 고증 역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어느 땐 되레 살까지 붙여졌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낭설로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마을 이름(입석마을)에 원용될 정도의 대상이었다면 각별한 보호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구려비가 예성동호회에 처음 발견될 당시엔 꼿꼿이 서 있었고, 대장간이니 빨래판이니 하는 말들은 상당부분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성동호회와 단국대 박물관팀에 의해 처음 발견된 장소는 현 위치가 아닌 인접한 도로의 건너편이다. 이곳엔 현재 시멘트로 제작한 마을 비가 수풀에 섞여 홀로 서 있는데 바로 이와 나란히 붙어서 위치한 것이다. 문제의 시멘트비는 1972년 세워진 것으로, 그 해 엄청난 홍수가 나 충주 제천 단양지역이 물난리를 겪으면서 이곳 입석마을도 물에 휩쓸려 흔적조차 찾기 힘들게 된 것이다.

그 후 이 마을이 복구되자 그 과정이 당시 전국을 휩쓸던 새마을운동의 모범 사례로 선정됐고, 새마을지도자였던 주민 김재문씨가 그 해 대구에서 열린 새마을 전국대회에 초정돼 박정희 전 대통령 앞에서 성공사례 발표까지 하게 됐다. 이를 기념해 ‘七顚八起의 마을’이라는 비문이 적힌 시멘트비를 제작,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던 선돌, 다시 말해 고구려비 옆에 나란히 세운 것이다.

대장간 얘기는 발견 당시 단국대 박물관팀이 현 고구려비의 위치에 있던 민가를 조사본부로 사용하던중 어느날 촌로가 나타나 “이 집터가 옛날 대장간 자리이고 그 모퉁이에 비석이 있었는데 여기에 고사를 지냈다”고 말한 것이 확대재생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연관돼 대장간의 고구려비가 72년 수해 때 넘어져 방치되다가 79년 발견 지점으로 옮겨 세워졌다는 설도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이 백설기를 놓고 빌었다는 얘기는 박물관팀이 비를 발견한 시점에 마침 비 위에 백설기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최초 발견자 김례식씨(향토 사학가)는 밝혔다. 그는 또 “빨래판 얘기는 청주 흥덕사지 발굴 당시 발견된 신라 사적비(현재 청주박물관 보관) 때문에 와전”된 것이다.

신라 사적비는 실제로 빨래판으로 사용돼 지금도 그 흔적이 분명하지만 고구려비는 아니다. 엉뚱한 소문이 번진 결과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이전의 추적은 현재로선 어렵다. 현 도로 옆의 논에 방치돼 있었다는 얘기도 일부 전해지지만 정확한 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곳이 입석마을로 불리는 것에 착안하면 마을 입구 경계 지점의 초석인 선돌로 대접받으며 주민들로부터 구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고구려비는 발견된 이후 당시 입석마을 새마을 창고로 옮겨져 삼엄한(?) 보호를 받다가 지금의 위치에 복원됐다.

고구려비가 발견된 이곳은 창동 목계 가흥나루로 상징되는 옛날 남한강 수로교통의 요충지로, 주민들에 따르면 6·25 전까지만해도 소금배와 뗏목이 오르내려 멀리 영남에까지 그 상권이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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