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잡은 민주당, 부정선거세력 처벌 미온 ‘불만 팽배’
7·29 계기로 민심폭발 …보은중·음성중학생 시위 주도

기록되지 않은 4·19
① 미완의 혁명
② 타오른 불꽃
③ 지역별 7·29부정선거운동 Ⅰ
④ 지역별 7·29부정선거운동 Ⅱ
⑤ 끝나지 않은 4·19

 

▲ 청주 상당공원에 세워진 4·19 혁명 기념 기념탑. 지난 4월 16일 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 부회장인 정상혁 보은군수가 기념탑을 찾아 헌화 참배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낸 4·19 혁명.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스스로 나서 정권을 교체한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미완의 혁명이기도 했다. 혁명의 발단은 3·15 부정선거였지만 밑바닥 민심의 바램은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민심은 부정선거 등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한 권력의 퇴진만이 아니었다.

당시 나왔던 ‘반혁명세력 척결’이란 구호에서 보듯 권력의 교체와 사회구조의 개혁이었다. 이러한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4·19 혁명 이후 7·29 민의원 선거까지 진행된 충북지역의 사회운동이다.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인터뷰 했던 7·29 부정선거 규탄 투쟁 참가자들은 4·19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7·29 이후까지 연속적으로 이뤄 진 운동임을 증언했다. 충북지역은 4·19 혁명 당시 뿐만 아니라 미완의 혁명을 완성하려한 지속적인 운동이 전개된 중심지였다.

1960년 충북대학교 1학년 학생으로 부정선거 규탄투쟁에 나섰던 정상혁 군수. 보은군 회인면이 고향인 정 군수는 실제로 고향 투표장에서 부정선거의 실상을 눈으로 목격했다. 정 군수에 따르면 투표장 길목에는 막걸리 한 사발 걸칠 수 있는 자리가 차려졌고 고무신짝이 나돌아 다녔다. 정 군수는 “학교 주변에 무슨 단체 사람들인지 군복을 입혀놓고 총까지 들고 서 있었다. 투표장에 들어가 보니 앞에 어르신들이 용지를 펴서 감독직원 한테 보여주고 투표함에 넣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 군수가 목격한 것처럼 충북도내에서는 ‘4할 사전투표제’, ‘3인1조 투표’ 등 온갖 선거부정이 자행됐다.

이렇게 진행된 1960년 3.15부정선거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의 끝자락이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실종 한 달여 만에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은 봉기의 도화선이 됐다.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 운동이 벌어졌다. 충북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규모면에서 서울과 비슷할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됐다.

부정선거 규탄운동은 3월 중순부터 4월말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고교생을 중심으로 연합시위의 양상을 띠었다. 규모도 압도적이었다. 당시 한국일보는 청주의 4월18일 연합시위에 모인 군중을 2500명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같은 날 고려대시위의 군중에 필적할만한 수준이다. 이를 반증하듯 도내 4.19 관계자들은 “청주는 서울, 마산 등과 함께 4.19 5대 봉기지역이다”고 꼽았다.
 

중학생 운동 재조명해야

충북 4·19혁명은 3·15 부정선거 규탄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후 학원민주화운동, 노조설립과 임금인상 투쟁, 수리조합 민주화운동, 엽연초 경작조합 배상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4·19혁명 세 달 뒤 7·29 민의원·참의원 선거에서 반혁명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낙선운동으로 이어졌다.

국회는 각각 6월15일과 23일 내각책임제에 입각한 개정헌법과 국회의원 선거법을 공포하고 이에 따라 7월29일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를 치른다. 당시 민의원 선거구 13곳 가운데 9곳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고 괴산·음성·중원에서는 무소속, 단양에서는 헌정동지회 후보가 금배지를 달았다. 참의원 당선자 4명 중에는 3명이 민주당 후보고 자유당 당선자는 1명이었다.

민주당의 선거 압승은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사임하고 허정을 수장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허정 과도정부는 비혁명적 방식으로 혁명을 수행한다는 원칙하에 부정선거 원흉의 처벌조차 뒤로 미루고 모든 역량을 헌법 개정과 총선 관리에 집중했다.

4·19혁명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은 혁명의 정치적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일단 학원으로 돌아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권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민주당은 총선 승리에만 관심이 있었다.

민주당은 7·29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지만 곧 내분에 휩싸였다. 윤보선, 김도연 등을 대표로 하는 구파와 장면을 대표로 하는 신파는 조각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에 윤보선, 총리에 장면이 선출되었다.

새롭게 들어선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장면 정권은 부정선거 원흉 처벌에 미온적이었다. 4.19혁명 이후 그동안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하던 학생들과 혁신세력이 다시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억눌렸던 민중들의 각종 요구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노동쟁의가 급증했고, 교원노조가 정부의 불인정 방침에도 불구하고 조직되었으며, 한국전쟁 기간 중 억울하게 학살당한 유족들의 신원운동이 확산됐다.

충북지역의 7·29선거를 전후한 부정선거 규탄운동 및 ‘반혁명세력 척결’ 구호는 이러한 흐름속에 있다.

당시 7·29 선거에서 충북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 출신의 기득권 세력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 자유당 출신 인사들은 7·29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거 무소속으로 변신해 기득권 유지를 노렸다. 이들은 무소속으로 변신한데 이어 갖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정치생명의 연장을 꾀했다.

이러한 부정부패 세력에게 철퇴를 가한 것은 다름 아닌 중학생, 7월 19일 보은중학생 800명을 필두로 7월 22일 음성중학생 등 도내 중학생들이 “반혁명세력 물러가라”며 시위에 나섰다.

시대가 57년이 지난 오늘, 중학생들이 민주주의 문제로 반정부시위에 나선다면 사회와 여론은 이를 어떻게 평가할까?

/ 취재=김남균 기자·박만순(함께사는우리 대표)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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