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유역 정벌한 후 척경(拓鏡) 기념한 듯

높이가 144㎝인 고구려비의 ‘진실’은 전체 비문에 대한 판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원히 역사속으로 묻힐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 해독된 내용으로 보아 북벌남정(北伐南征)을 기치로 내걸고 중국 대륙을 도모한 광개토대왕에 이어 평양천도와 남하정책을 추구하며 영토확장에 나선 장수왕이 이곳 충주 지역을 정벌한 후 신라와의 화친과 함께 척경(拓鏡)을 위한 정계비(국경을 정하여 적은 비석)로 고구려비를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비문중에 고구려가 형님이 되고 신라가 아우가 된다는 기록과, 고구려의 영토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조령(문경새재)과 죽령(소백산 지역)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 있다.

특히 비문엔 고구려가 신라의 왕과 신하에게 의복을 하사했다(寐錦之衣服...賜上下衣服)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그 당시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가 이미 정립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관리 명칭과 제도에 대한 언급도 눈에 띈다. 비문 서두에 나타난 고려대왕(高麗大王)은 고구려의 왕이라는 뜻이고, 그 밑의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하부(下部) 수사(守事) 주부(主簿) 등은 모두 고구려 관직 이름이다. 만주 퉁구의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성이름 고모루성(古牟婁城)이라는 글자도 있어 이 비가 고구려비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신라를 지칭한 동이(東夷) 신라매금(新羅寐錦·신라에서 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이전의 용어)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신라 영토내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다는 의미) 등의 내용은 고구려의 신라정벌을 간접적으로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비문 전체를 놓고 보면 사람 이름이나 고유명사 등이 특히 심하게 훼손돼 있어 고구려가 물러난 후 후세인들이 불리한 역사를 희석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비문을 지우지 않았나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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