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덕·김시민·홍범식의 죽음과 충절을 생각하며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0)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동진천이 돌아 나가는 물가에 자리 잡은 괴산읍 전경. 괴산군은 증평군이 분리된 이후 2016년 6월 현재 인구 3만 8000여 명 정도로 군세가 축소됐다.

모래재를 넘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재를 넘기 전 사리면부터 괴산군이지만 모래재를 넘어야 비로소 괴산 땅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 듭니다. 괴산군이 증평군과 분리되기 전부터 그랬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길일지언정 큰 고개 하나쯤 넘어야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맛이 난다고 하면, 당신은 아마 말없이 웃을 겁니다. 철없는 말이긴 하나 그럴듯하다는 뜻이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속리산 천왕봉을 떠난 한남금북정맥이 청주 상당산성을 거쳐 질마재와 모래재를 지나가니까, 모래재를 넘는 건 강물을 바꾸는 것이므로 다른 세상이라는 말이 아주 헛말도 아닙니다. 34번 도로를 새로 닦으면서 고개를 살려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건 그런 마음입니다.

도로변 곳곳에 ‘대학찰옥수수’라고 써 붙인 천막이 눈에 띕니다. 여름에 괴산 지역을 지나노라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괴산 옥수수가 제철을 만났구나 생각하니 입안에 군침이 돕니다. 대학찰옥수수는 이제 괴산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농학박사 최봉호 씨가 1990년대 초 충남대 재직 시절에 개발한 신품종이어서 흔히 대학찰옥수수로 불리는데, 종자의 공식 이름은 ‘연농 1호’라고 합니다. 최 박사의 고향인 장연면 방곡리에서 시험재배하여 길가에서 판매한 것이 유명세를 타고 괴산 전역으로 퍼져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습니다.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을 할 정도로 불티나게 팔리는 건 물론 한겨울에도 냉동 포장된 옥수수를 공급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먹어본 사람들은 맛있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하거니와, 일반 옥수수보다 통이 가늘고 당도가 높으며 껍질이 얇은 것이 특징입니다. 매년 씨앗을 공급받아 재배하기 때문에 ― 대학찰옥수수는 1대 교잡형으로 2대에서는 그 특성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종자로 쓸 수 없습니다 ― 항상 똑같은 찰기와 맛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종자는 최 박사가 직접 운영하는 미국의 채종포에서 채종해 국내로 들여오며, 장연신협을 통해 충북 괴산 인근 지역에만 한정 공급해 왔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재배하고 싶어도 종자를 구할 수 없었던 거죠.
 

▲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의 명장, 충무공 김시민을 제향하는 충민사 전경. 사당 뒤로 그의 묘소가 있다.

미국간 옥수수 종자, 확산 초읽기

그런데 2015년 종자 판매권을 인수한 농우바이오가 공급을 전국으로 확대할 방침을 밝힌 터여서 괴산 대학찰옥수수 농사가 불안하게 됐습니다. 최 박사의 염두에는 ‘고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거대기업이야 많이 파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을 테니, 마침내는 농민들의 염려대로 씨앗 값은 오르고 옥수수 값은 하락하게 될 것입니다. 길을 따라 줄줄이 잇닿은 옥수수밭 위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괴산, 하면 흔히 산이 많은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백두대간이 달리는 남동쪽으로 덕가산·칠보산·보배산·군자산·낙영산·조봉산 등의 명산들이 연봉을 이루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어디를 가나 산세가 수려하고 기이하여 괴산이라 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 중에서도 연풍은 예부터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그야말로 첩첩산중 고을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속된 말로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가는 연풍 원님’이란 말이 지금까지도 회자됩니다.

올 때는 하도 막막하여 울고, 갈 때는 떠나기 싫어 울었다는데요. 백성들이 철따라 정으로 가져오는 잣죽의 별미며 송이버섯 안주에 향기로운 국화주, 새재의 타는 듯한 단풍……, 어딜 가면 이런 낙원을 구경할까 싶어 옷깃을 적셨다는 겁니다. 조선 정조 때 풍속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단원 김홍도가 연풍 현감으로 부임했던 적이 있는데, 아마 연풍이 아닌 다른 고을 현감이었다면 그렇게 오래 얘깃거리로 남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산속에 농지가 흔할 리 없을 테고, 보강천이 지나가는 증평에 그나마 넓은 평야가 발달됐는데 증평군의 분리로 그것을 잃고 세가 위축되었으니 괴산군으로서는 감정이 좋을 수가 없겠습니다.

괴산군, 충북 최초 3.1만세운동

더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신라 가잠성(假岑城)의 현령 찬덕(讚德)은 용맹과 절개를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611년 겨울 백제군의 침공을 받아 100여 일이나 포위됐는데,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성이 함락되자 홰나무에 머리를 찧고 장렬하게 죽었습니다. 7년 후 618년 찬덕의 아들 해론(奚論)이 군사를 이끌고 가잠성 탈환에 나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두 부자의 충절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데, 태종 무열왕이 듣고 가잠성을 홰나무 괴(槐) 자를 써 괴주(槐州)라 부르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괴양현이라 하여 ‘괴’자가 붙은 이름을 얻은 것이 경덕왕 때이니 두 부자의 죽음 이후 120년 이상 지난 뒤의 일이니 말입니다. 가잠성이 괴산이라는 견해 또한 학계의 추론일 뿐입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도 ‘어딘지 알 수 없다’고 한 삼국의 지명이 395곳에 이르거니와 가잠성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삼국 혈전의 개시’ 편에서 ‘가잠성은 지금의 괴산’이라고 밝히고 찬덕의 이야기로 인하여 괴산이란 지명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적었습니다.

한편 괴산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다는 점을 들어 괴(槐) 자를 느티나무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홰나무를 괴목·괴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고문서에서 느티나무를 괴수라고 쓰는 경우가 있는 데서 오는 혼동으로 보입니다. 홰나무는 콩과이고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로 사뭇 다른 종류입니다. 옛날 중국의 주나라 때 관제를 기록한 《주례》에는 궁궐의 외조(外朝)에 홰나무를 세 그루 심는 원칙이 있는데, 이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자리임을 나타나내는 의미입니다. 서울 창덕궁 돈화문 안의 세 그루 홰나무도 같은 의미이니, 찬덕의 고사가 사실이라면 그렇게 귀하게 높인다는 뜻으로 괴(槐) 자를 쓰도록 했을 것입니다.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히는 진주대첩은 3000의 병력으로 3만의 군사를 격퇴시킨 유명한 전투입니다.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충민사는, 진주 목사로서 그 6일 간의 혈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이 충무공 김시민을 제향하는 사당입니다.

또 1910년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당시 금산 군수였던 홍범식이 비분 끝에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자결하였는데, 그는 바로 괴산이 낳은 문호 홍명희의 부친입니다. 홍명희는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적은 부친의 유서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번져갈 때 충북에서 첫 신호탄을 올린 곳이 괴산이었던바, 그 선봉에 홍명희가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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